Camiael Studio
작품 소개로13화 · 소설

겨울 서랍

겨울방학 초. 이안은 떠났고, 아무 소식도 없다. 이서는 미룬 전학 신청서를 내러 교무실까지 갔으나 문 앞에서 돌아선다. 닳은 공지를 몇 번이나 다시 펴도 뜻을 못 읽고, 상실을 인정하려다 또 각주로 덮는다. 방학 학교에서 도하가 또 이름 없이 캔을 건네고(다섯), 도하는 종업식의 헛디딤이 창피해 가을을 우회하고, 가을은 그림에 몰두하느라 그 애가 아예 없어진 것도 모른다. 아무도 움직이지 못한 방학 초. 모든 감정이 얼어붙은 채 보존된다.

겨울에는 아무것도 썩지 않는다. 아무것도 자라지도 않는다. 다만 언 채로, 그대로 있는다.

그 방학, 내 서랍이 꼭 그랬다.


방학이 시작되고, 학교는 조용해졌다.

이안이 없는 건 방학이라서가 아니었다. 그 애는 떠났다. 방학이 끝나고 개학이 와도, 그 자리는 빈 채일 거였다. 나는 그걸 아는 유일한 사람 중 하나였다. 가을도 모르고, 반 애들 대부분도 모르고, 방학의 무심함이 그 애의 부재를 감쪽같이 덮고 있었다. 다들 방학이라 안 보이는 줄 알겠지. 개학하면 알게 되겠지. 그 애가 조용히 사라지는 데는, 방학이라는 계절이 완벽한 공범이었다.

나는 학생회 방학 근무로 며칠에 한 번 학교에 나왔다. 텅 빈 복도는 소리가 잘 울렸고, 그래서 더 조용했다. 조용한 게 이렇게 큰 소리를 낼 줄은 몰랐다. 그 애가 있을 때 나는 등 뒤의 시선이 시끄럽다고 생각했는데, 시선이 사라진 등 뒤가 사실은 더 시끄러웠다. 없는 것이 있는 것보다 크게 울리는 것. 그게 그 겨울에 내가 배운 첫 번째 것이었다.


가방 안에는 여전히 두 장의 종이가 있었다.

못 낸 전학 신청서 한 장. 닳은 학생회 공지 한 장. 하나는 안 끝내서 미결이고, 하나는 못 풀어서 미결이었다. 나는 미결을 못 견디는 사람인데, 그 두 미결을 방학째 가방에 넣고 다녔다. 꺼내지도, 버리지도, 처리하지도 못한 채.

그날은 마음을 먹고 나온 날이었다. 서류를 낸다. 방학 근무가 있는 날이니 교무실에 사람이 있고, 제출하면 오 분이면 끝난다. 그 애는 이미 떠났으니 이건 형식일 뿐이고, 형식을 며칠 미룬다고 떠난 사람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부회장이 서류를 깔고 앉는 건 빈틈이고, 나는 빈틈을 수치로 여기는 사람이다. 논리는 완벽했다. 나는 완벽한 논리를 들고 교무실로 갔다.

그리고 문 앞에서, 돌아섰다.


손잡이까지 손이 갔었다. 문 너머로 난로 냄새와 선생님들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문을 열고, 서류를 내밀고, "차이안 전학 건이요" 한마디만 하면 끝이었다. 오 분. 아니, 삼 분.

그런데 그 삼 분이, 안 됐다.

서류를 내는 순간 그 애의 학적이 넘어가고, 이 학교에서 차이안이라는 이름이 지워진다. 그건 이미 일어난 일의 서류상 확인일 뿐인데, 나는 그 확인을 내 손으로 하는 게 안 됐다. 이상한 논리였다. 사람은 이미 갔는데 종이를 못 넘기는 것. 장례식은 끝났는데 부고를 못 쓰는 것 같은. 나는 문 앞에 서서,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로, 일 분쯤 그대로 있었다. 그러고는 손을 내리고, 돌아서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학생회실로 걸어갔다. 복도에서 마주친 선생님께 인사도 했다. 목소리는 평소처럼 나왔다. 완벽하게.

완벽한 건 겉뿐이었다. 나는 그날, 내 평생 처음으로 마감을 스스로 어긴 사람이 됐다. 그것도 두 번째로. 종업식 날 한 번, 오늘 또 한 번. 한이서의 장부에 그런 항목은 없었는데, 겨울이 자꾸 없던 항목을 만들었다.


학생회실에서, 나는 또 그 공지를 폈다.

닳은 접힘 자국을 따라 조심스럽게. 몇 번을 펴 봐도 내용은 같았다. 분리수거 요일 안내. 내가 만든, 세상에서 제일 사무적인 종이. 나는 그걸 암호문처럼 들여다봤다. 이 애는 왜 이걸 갖고 있었나. 왜 이렇게 닳도록 폈다 접었나. 왜 하필 이걸, 마지막 날 서랍에 두고 갔나.

가설은 몇 개 세울 수 있었다. 우연히 남은 것이다(그러기엔 접힘 자국이 너무 많다). 뭔가를 싸느라 쓴 것이다(그러기엔 너무 곱게 접혔다). 나한테 남긴 것이다(그러기엔... 그러기엔 뭐가 걸리는지, 나는 그 문장을 끝까지 못 썼다). 데이터가 부족했다. 아니, 데이터는 이미 충분한데 결론을 내리는 쪽이 고장 나 있었다. 결론이 뻔히 보이는 방향에 서 있는데, 나는 그쪽으로 고개를 못 돌렸다. 그쪽으로 돌리면, 그 애가 왜 나를 봤는지의 답이 어렴풋이 보일 것 같았고, 답이 보이면 나는 그 답을 잃은 사람이 되니까.

모르는 채로 있으면 미결이지만, 알아 버리면 상실이었다. 나는 미결과 상실 중에서, 처음으로 미결 쪽을 골랐다. 미결을 못 견디는 사람이, 미결을 골랐다. 그 겨울 내 장부는 그렇게 계속 앞뒤가 안 맞았다.


복도에서 도하를 만났다.

방학 학교의 좋은 점이자 나쁜 점은, 사람이 적어서 마주침이 도드라진다는 거다. 농구부 방학 훈련을 마치고 나오는 길인지, 도하는 머리가 반쯤 젖어 있었고 얼굴에서 김이 났다. 그 추운 날에 혼자 여름 같은 온도를 하고 있었다.

"어, 한이서. 방학인데 나왔네." 그러고는 늘 그렇듯, 손에 든 걸 내밀었다. "이거. 자판기에서 두 개 나왔어."

두 개 나왔다는 말이 거짓말이라는 건 나도 알고 그 애도 알 거였다. 자판기는 두 개를 주지 않는다. 그건 그냥, 이름 없는 친절에 그 애가 붙이는 가장 게으른 핑계였다. 나는 받았다. 안 마신 캔이 이제 다섯이 됐다. 다섯. 나는 그 숫자를 세고 있는 나를 또 발견했고, 또 못 본 척했다.

"넌 방학인데 왜 이렇게 부지런하냐." 도하가 웃으며 지나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잠깐 봤다. 이안이 없는 겨울에, 나한테 말을 거는 사람은 이제 저 애 하나였다. 그 사실이 뭔가를 움직였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안 움직였다. 내 마음은 그 겨울, 뭘 새로 시작할 온도가 아니었다. 서랍들이 다 얼어 있어서, 새 칸을 열 손가락이 곱았다.

집에 가는 길에, 나는 손안의 캔을 내려다봤다. 여전히 따뜻했다. 자판기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된 온기. 이 온기는 한 시간이면 식을 거고, 식으면 저 서랍의 네 개와 똑같은 온도가 될 거였다. 나는 문득 그게 이상했다. 도하의 캔은 늘 따뜻하게 와서 차갑게 보관됐다. 주는 사람은 온기를 줬는데, 받는 나는 그걸 꼭 식혀서 넣었다. 마시면 없어지니까 못 마시고, 버리면 버리는 거니까 못 버리고, 그래서 식히는 것. 온기를 보관하는 유일한 방법이 온기를 죽이는 것뿐이라는 게, 그 겨울 내 방식의 전부였다. 나는 그 생각을 하다가, 생각이 어디로 가는지 보여서, 거기서 껐다.


미술실 앞을 지나다, 가을을 봤다.

방학인데도 나와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전시 마무리인지 새 그림인지, 창가의 그 자리 그대로. 그 애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자기가 다가가려던 그 전학생이 이제 이 학교 학생이 아니라는 걸, 저 애는 모른다. 개학하면 알게 될 거다. 빈 책상을 보고, 수군거림을 듣고, 그제야. 나는 그걸 미리 알려 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뭐라고 알려 주나. '네가 맴돌던 그 애, 전학 갔어'라고? 그 문장은 그 애가 맴돌았다는 걸 내가 봤다는 뜻이 되고, 그 애의 마음을 내가 넘겨짚었다는 뜻이 된다. 남의 서랍을 함부로 여는 건 예의가 아니다. 나는 내 서랍도 못 여는 주제에, 남의 서랍 앞에서는 그렇게 깍듯했다.

복도 저쪽에서 도하가 미술실 쪽을 흘낏 보고는, 방향을 틀어 다른 계단으로 내려갔다. 종업식의 그 헛디딤이 아직 창피한 모양이었다. 다가가던 애는 우회하게 됐고, 몰랐던 애는 계속 모르고, 떠난 애는 소식이 없고, 남은 나는 문 앞에서 돌아선다. 이 링은 겨울 동안, 아무 데로도 안 굴러갔다.


방학 근무를 마치고 나오기 전에, 나는 매번 하는 일이 하나 생겼다.

2학년 2반 교실을 한 바퀴 도는 것. 명분은 순찰이었다. 방학 중 교실 창문 단속, 난방 점검. 그런 항목이 실제로 있기는 했다. 나는 그 항목 뒤에 숨어서, 매번 그 교실에 들어갔고, 매번 뒤 구석 그 자리 옆을 지났다. 빈 책상은 늘 그대로였다. 아무도 안 앉고, 아무도 안 치우고. 개학하면 저 책상은 다른 용도로 배정되거나, 뒤로 밀려나거나, 아무튼 차이안의 자리가 아니게 될 거였다. 그 전까지, 겨울 동안만, 저건 아직 그 애 자리였다.

나는 그 옆을 지나며 아무것도 안 했다. 앉지도 않고, 서랍을 다시 열지도 않고, 그냥 지나갔다. 지나가는 데 삼 초쯤 걸렸다. 그 삼 초를 위해 나는 교실 한 바퀴라는 삼 분을 썼고, 그 삼 분을 위해 순찰이라는 명분을 세웠다. 효율을 최우선으로 사는 사람이, 삼 초를 위해 그렇게 긴 우회로를 만들었다. 누가 봤으면 물었을 거다. 왜 매번 그 반만 도느냐고. 아무도 안 봐서, 나는 그 질문을 안 받아도 됐다. 겨울 학교의 텅 빈 복도가, 이번엔 내 공범이었다.


집에 와서, 나는 서랍을 열었다.

진짜 서랍 말이다. 책상 둘째 칸. 못 낸 서류와 닳은 공지를 가방에서 꺼내 거기 넣었다. 그 옆엔 안 마신 캔 다섯 개가 나란히 서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한참 봤다. 언제부턴가 내 서랍은 처리 못 한 것들의 보관소가 돼 있었다. 원래 내 서랍은 처리 끝난 것들의 무덤이었는데. 정리되고, 이름 붙고, 잠긴 것들만 들어오던 곳이었는데. 지금 저 안에 있는 건 전부 이름 없고, 안 끝났고, 안 잠기는 것들이었다.

이상하게, 나는 그걸 치우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정리를 못 하는 사람들을 이해 못 하며 살았다. 책상에 물건이 쌓이는 애들, 미제출이 밀리는 애들, 답장을 미루는 애들. 그 사람들의 서랍 속이 어떤 상태일지 상상만 해도 숨이 막혔다. 그런데 지금 내 서랍이 정확히 그 상태였다. 그리고 더 이상한 건, 그게 숨 막히지 않았다는 거다. 오히려 저 서랍을 열 때마다, 나는 뭔가가 아직 안 끝났다는 사실에 이상한 안정을 느꼈다. 끝나지 않은 것들이 있는 한, 그 겨울은 아직 계속되는 중이고, 그 애가 있던 학기는 아직 완전히 과거가 아니었다. 정리가 끝나는 순간이 진짜 끝이라는 걸, 나는 정리를 미루는 사람들이 어쩌면 다 알고 있었다는 걸, 그 겨울에야 배웠다.

겨울에는 아무것도 썩지 않으니까. 저것들은 저 안에서 상하지 않고, 자라지도 않고, 그냥 언 채로 있을 거였다. 해빙기가 오면, 그러니까 개학을 하고 새 학기가 시작되면, 언 것들은 녹기 시작할 거고, 그때는 뭐라도 해야 할 거였다. 서류는 내야 하고, 공지는 읽어내거나 버려야 하고, 캔은... 캔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겨울이었다. 겨울은 미루는 계절이 아니라, 언 채로 견디는 계절이었다. 나는 그렇게 각주를 달고, 서랍을 닫았다.

영하 4도. 창밖은 며칠째 같은 온도였다. 아무것도 오지 않았고, 아무것도 가지 않았고,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아무 일도 없던 그 방학이, 나는 하나도 편하지 않았다. 얼어 있는 것들은 조용하지만, 없는 게 아니다. 서랍 속에서, 눈 밑에서, 언 것들은 다 녹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게 무서웠는지 기다려졌는지, 그 겨울엔 끝내 분간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