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miael Studio
작품 소개로12화 · 소설

두고 간 것

종업식, 이안의 마지막 등교. 이서는 마지막 기회였으나 용기가 안 나 사무적 접점조차 제대로 못 하고, 그 전학 서류를 제 손으로 처리도 못 한 채 유예한다(이름 없는 마음이 책임감을 이긴 무언의 인정). 이안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떠난다. WHY는 끝내 미공개. 단 세 가지를 두고 간다: 평소와 다른 '작별의 온도', 무언가 두고 간 흔적(그가 챙겨 읽던 이서의 학생회 공지물), 그리고 마지막에 딱 한 번 이서를 정면으로 본 시선. 이서는 그가 떠난 뒤에야 그 셋을 곱씹는다.

그날, 나는 너무 많은 걸 두고 왔다. 아니, 그 애가 너무 많은 걸 두고 갔다. 어느 쪽이 맞는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종업식이었다.

방학이 시작되면, 그는 이 학교에 없다. 오늘이 그를 보는 마지막 날일 수 있었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그냥 종업식'이라고 하루를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하면 오늘이 특별한 날이 아니게 되니까. 특별하지 않은 날엔, 특별한 일을 안 해도 되니까.

그런데 어제 접수한 서류 한 장이, 아침부터 손끝에 자꾸 걸렸다. 전학 신청서. 이름 칸의 세 글자. 나는 오늘 그걸 상급 부서에 올려야 했다. 그러면 그의 학적이 다른 도시로 넘어가고, 그의 떠남이 완결된다. 내 손으로. 학생회 일은 늘 그날 안에 빈틈없이 끝내는 사람인데, 나는 그 서류만 가방 안쪽에 넣어 두고, 종일 안 꺼냈다. 꺼내면 처리해야 하고, 처리하면 끝나니까.


점심 무렵, 나는 마음을 먹고 그에게 다가갔다.

명분은 준비돼 있었다. 서류 확인. 미비 사항 최종 점검. 사무적인 얼굴로, 사무적인 문장으로, 그 뒤에 숨어서 나는 마지막 접점을 만들 생각이었다. 왜를 물을 수도 있고, 작별을 대신할 수도 있었다. 전부 업무의 외피를 쓰고서.

그런데 그 앞에 서니, 그 사무적인 문장조차 안 나왔다.

준비한 건 '서류 처리 관련해서 확인할 게 있어'였는데, 입이 안 떨어졌다. 그를 보는 순간, 이게 마지막이라는 사실이 준비한 모든 문장을 목 앞에서 막았다. 나는 결국 아무것도 제대로 못 물었다. "...방학, 잘." 그 반 마디가 전부였다. 나머지는 삼켰다. 얼음공주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나는 그 앞에서 반 마디 말을 하는 데도 온 힘을 써야 했다. 용기라는 건, 마지막 날이라고 갑자기 생기는 게 아니었다.


그가 나를 봤다.

그러고는 짧게 답했다. "어. 너도." 딱 그만큼. 늘 그랬듯 짧고 딱딱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짧은 두 마디의 온도가 평소와 달랐다. 뭐가 다른지 말로는 못 하겠는데, 분명히 달랐다. 나는 남의 목소리에서 온도를 읽는 사람이다. 그 애의 '너도'에는, 여느 때의 무뚝뚝함 아래 뭔가가 한 겹 더 있었다. 작별의 온도라고, 나는 나중에야 이름을 붙였다. 그때는 그냥, 이상하다고만 느꼈다. 왜 오늘따라 이 애 목소리가 이렇게 들리지, 하고.

나는 그 위화감을 붙잡고 뭔가 더 물었어야 했다. 그런데 못 했다. 그 애는 이미 돌아서 있었고, 나는 늘 그렇듯 마지막 순간에 눈을 돌렸다. 물어야 할 걸 안 묻는 데, 나는 재주가 있다.


종업식이 끝나고, 아이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나는 학생회 마무리로 교실에 남아 있었다. 반이 빈 뒤, 자리 정리를 하다가, 그 애가 앉던 자리를 지나게 됐다. 교실 뒤 구석. 며칠째 내 등 뒤에서 시선이 오던 그 자리. 그 애는 이미 갔고, 책상은 비어 있었다. 흔적을 안 남기는 애답게, 깨끗했다. 사물함도 비었을 거였다. 언제든 떠날 사람처럼 살던 애니까.

그런데 그 빈 책상 서랍에, 종이 한 장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걸 꺼냈다. 접히고 닳은 프린트 한 장. 펴 보니, 내가 지난달에 만들어 붙인 학생회 공지였다. 별것도 아닌, 분리수거 요일 안내 같은 거였다. 그런데 그게 왜 그 애 서랍에 있지. 그것도 이렇게, 여러 번 접었다 편 자국이 선명하게. 누가 학생회 분리수거 공지를 이렇게 닳도록 갖고 다니나. 나는 그 종이를 한참 봤다. 무슨 뜻인지, 나는 몰랐다. 다만 이 애가, 내가 만든 뭔가를 이렇게 오래 갖고 있었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 손에 쥔 채로 남았다.

그게 무슨 단서인지, 나는 그날 못 읽었다. 나는 세상 모든 걸 다 읽으면서, 나한테 온 것만은 늘 제일 늦게 읽는 사람이니까.


나는 그 빈 자리에, 잠깐 앉아 봤다.

이 자리에서, 그 애는 며칠째 나를 봤을 거였다. 처음엔 시선의 감각만 있었다. 누가 나를 본다는, 등 뒤가 서늘한 느낌. 나는 그 정체를 알아내려고 나흘을 썼고, 폭설의 밤에 정면으로 마주 서서 겨우 이름을 알았다. 차이안. 그리고 그 뒤로도, 나는 늘 '왜'를 못 물었다. 물으면 흔들릴까 봐. 그렇게 미루는 사이, 그 애는 서류를 미뤘고, 나는 인정을 미뤘고, 우리는 각자의 미룸으로 겨울을 다 보냈다. 그리고 오늘, 그 미룸의 끝에 남은 건 이 빈 자리 하나였다.

이상했다. 그 애가 나를 볼 때는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는데, 이제 아무도 나를 안 보는 이 자리가, 부담스러웠던 그때보다 더 허전했다. 등 뒤가 서늘한 것보다, 등 뒤가 텅 빈 게 더 추웠다. 나는 그 서늘함을 없애고 싶어 했는데, 막상 없어지니 그 서늘함이 그리웠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이렇게 앞뒤가 안 맞는 거였다. 나는 계산을 제일 잘하는 사람인데, 이 계산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틀렸다. 있을 땐 밀어내고, 없어지니 붙잡는 것. 그 애의 시선을, 나는 있을 때 한 번도 제대로 마주 본 적이 없으면서, 없어지고 나서야 그쪽을 자꾸 돌아봤다.


그리고 하나 더, 나는 뒤늦게 떠올렸다.

아까, 그 애가 돌아서기 직전에. 딱 한 번, 그 애가 나를 정면으로 봤다. 며칠 전 폭설의 밤처럼, 비껴가지 않는 정면으로. 그때는 상황에 떠밀린 정면이었는데, 오늘 건 그 애가 스스로 준 정면이었다. 아무 말도 없이, 그냥 한 번. 나는 그 순간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고, 그래서 그냥 흘려보냈다. 그런데 그 애가 완전히 사라지고 난 지금, 그 마지막 정면이 자꾸 되감긴다. 그 눈은, 처음 보는 사람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보는 사람을 보는 눈이었다. 나는 그걸, 그 애가 없어지고 나서야 알았다.

작별의 온도, 닳은 공지 한 장, 그리고 마지막 정면. 그 애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떠났는데, 말 대신 그 세 개를 두고 갔다. 나는 그 셋 중 어느 것도, 그 자리에선 못 읽었다. 다 지나가고 나서야 하나씩 폈다. 미결을 못 견디는 내가, 가장 큰 미결 하나를 끝내 못 풀고 보냈다. 왜 나를 봤는지. 왜 떠났는지. 그 애는 그 답을 말 대신 흔적으로 남겼는데, 나는 흔적을 읽는 데 서툴렀다.


복도 저쪽에서는, 오늘도 익숙한 장면이 하나 있었다.

도하가 가을 앞에 서 있었다. 방학 전 마지막이라 그런지, 오늘은 정말로 말을 걸려는 것 같았다. 입을 열고, 뭔가 말하려다가. 그런데 이번엔 목이 막힌 정도가 아니었다. 완전히 헛디뎠다. 무슨 말을 하려던 건지, 도하는 손에 든 걸 놓쳤고, 엉뚱한 소리를 냈고, 얼굴이 벌게져서는 도망치듯 물러섰다. 가을은 그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 뒷모습을 봤다. 늘 매끄럽게 사람을 대하던 애가, 딱 한 사람 앞에서 저렇게까지 무너지는 걸, 나는 처음 봤다.

가슴의 가시가 또 욱신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욱신함이, 아프기만 한 게 아니라 조금 알 것 같았다. 저 애도 나랑 똑같구나. 하고 싶은 말을 딱 한 사람 앞에서만 못 하는 것. 다가가려다 헛디디는 것. 이 학교엔 오늘, 못 다가간 사람이 나 말고도 있었다. 나는 그게 위로가 되는 건지 더 쓸쓸한 건지, 분간 못 했다.

가을은 끝까지, 그 전학생이 오늘 떠난 줄도 몰랐던 것 같다. 그 애는 늘 그림에만 빠져 있었고, 세상이 언제 색을 바꾸는지 남보다 늦게 아는 애니까. 다가가고 싶은 사람이 조용히 사라진 것도 모른 채, 가을은 오늘도 멀리서 그 빈자리 쪽을 한 번 보고 말았다.


집에 오는 길, 나는 오늘 도하한테서 캔을 못 받았다는 걸 깨달았다.

늘 있던 게 없으니, 없다는 게 더 크게 느껴졌다. 안 마신 캔이 넷인데, 오늘은 다섯이 안 됐다. 나는 그동안 그 캔들을 하나도 안 센다고 여겼는데, 오늘 하나가 안 오니까 그제야 그걸 세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도하는 오늘 가을 쪽에 정신이 팔려 나를 못 봤을 거다. 그 애한테 나는 원래 '그냥'이니까,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거였다. 그런데 그 그냥이, 오늘은 조금 서운했다. 나는 그 서운함에도 이름을 안 붙였다. 오늘은 이미, 이름 못 붙인 게 너무 많은 날이었으니까.

웃긴 건, 오늘 하루 나를 가장 흔든 두 사람이, 한 명은 아무 말 없이 떠났고 한 명은 아무 말 없이 캔을 안 줬다는 거다. 떠난 사람은 시선을 거둬 갔고, 남은 사람은 온기를 안 건넸다. 나는 그 두 부재를 나란히 놓고, 어느 쪽이 더 허전한지 재 보려다 그만뒀다. 재는 순간, 내가 그 둘을 다 신경 쓰고 있었다는 게 들통날 테니까. 얼음공주는 아무도 신경 안 쓰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나는 오늘 두 사람이나 신경 쓰고 있었다. 그것도 둘 다, 나한테 뭘 안 해 줬다는 이유로. 안 준 것에 이렇게 흔들리는 걸 보면, 나는 생각보다 훨씬 많이, 이미 그들에게 뭔가를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가방 안에는, 처리 못 한 서류 한 장과 닳은 공지 한 장이 나란히 들어 있었다.

하나는 그의 떠남을 완결시키는 종이였고, 하나는 그가 왜 나를 봤는지를 말없이 담은 종이였다. 나는 앞엣것을 끝내 못 올렸고, 뒤엣것을 끝내 못 읽었다. 미결을 못 견디는 사람이, 오늘 미결을 둘이나 안고 집에 갔다. 하나는 안 끝내서, 하나는 못 풀어서.

영하 4도. 그 애가 떠난 첫날의 길은, 이상하게 다른 날보다 더 얼어 있었다. 나는 오늘 아무것도 처리 못 했다. 서류도, 마음도, 작별도. 다 손에 든 채로 집에 왔다. 그 애는 말없이 셋을 두고 갔는데, 나는 그 셋을 다 뒤늦게야 폈다. 두고 간 사람과, 두고 온 사람.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 많은 걸 못 준 채로, 학기 하나를 그렇게 끝냈다.

방학이 시작되면, 나는 저 서류를 결국 올려야 할 거다. 미룬다고 안 떠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니까. 그 애는 이미 갔고, 종이 한 장을 며칠 늦게 올리든 그건 이제 형식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 형식 하나를 오늘 못 했다. 형식이라는 걸 아는데도. 어쩌면 그 며칠의 유예가, 내가 그 애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한 가지였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모르게, 그 애의 떠남을 며칠만 더 안 끝내 두는 것. 말도 못 걸고, 붙잡지도 못한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몫이 그 초라한 유예였다.

그 애가 왜 나를 봤는지, 나는 이제 물을 사람도 없이 혼자 남았다. 그리고 그날 처음으로, 나는 미결이 안 풀린 게 다행이 아니라 아프다는 걸, 덮지도 못하고 그냥 느꼈다. 겨울은 아직 한참 남아 있었고, 그 애가 두고 간 것들은 내 가방 안에서 조용히, 아주 천천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