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miael Studio
작품 소개로2화 · 소설

빚으로 적히지 않는 것

개학 2~3일째. 이서가 도하의 친절을 '빚'으로 분류해 청산하려 하지만, 도하가 갚을 기회를 받지 않아 균형이 안 맞는다. 빗나간 너스레로 짧은 어색함이 생기고, 교실의 시선은 확신으로 굳지만 정체는 잡히지 않는다.

이름 없는 칸은, 밤사이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그 칸을 확인했다. 머릿속 표의 맨 끝, 분류가 안 되는 칸. 어제 두 줄이 적힌 그대로였다. 보통은 자고 일어나면 흐려지는데, 그건 또렷했다. 또렷한 게 거슬렸다.

나는 모르는 걸 제일 싫어한다. 모르는 건 위험하고, 위험한 건 약점이 되니까. 그래서 등굣길 내내 그 칸을 어떻게 처리할지 계산했다. 결론은 간단했다. 그건 빚이다. 도하가 나한테 펜을 주웠고, 자리를 양보했고, 캔을 뽑아 줬다. 받은 게 셋. 빚은 갚으면 끝난다. 오늘 셋을 다 갚아서 균형을 맞추면, 그 칸은 청산되고 사라진다. 비어 있던 칸으로 되돌아간다. 비어 있는 건 안전하다.

빚이 싫은 건 액수 때문이 아니다. 빚이 있으면 상대가 나보다 반 뼘 위에 서기 때문이다. 갚기 전까지 나는 그 사람에게 조금 빚진 사람이고, 빚진 사람은 약자다. 나는 누구에게도 약자인 게 싫었다. 그래서 받은 건 반드시, 가능한 한 빨리 갚는다. 고맙다는 말도 길게 안 한다. 길게 고마워하면 그 마음이 또 빚처럼 남으니까. 깔끔하게 주고받고, 0으로 맞추고, 거기서 끝낸다. 그게 내가 사람을 견디는 방식이다. 누구도 내 위에 서지 못하게, 대신 누구의 위에도 서지 않게. 정확히 같은 높이에서, 정확히 모르는 사이로.

영하 4도. 오늘도 손이 시렸지만, 나는 장갑을 끼지 않았다. 갚을 게 있는 사람은, 손이 시려도 정신은 또렷해야 한다.


교실 문을 열자 도하가 먼저 와 있었다.

"왔냐, 부회장."

그 애는 늘 그런 식으로 인사한다. 누구한테나, 아침마다, 별 의미 없이. 나는 고개만 까딱하고 자리에 앉았다. 도하가 자기 프린트를 내 책상 쪽으로 슬쩍 밀며 말했다. "이거 어제 진도. 너 학생회 회의 갔을 때 나간 거. 같이 봐." 빌려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같이 보자고 펼쳐 두는 것. 그것도 빚 목록에 한 줄 추가됐다. 넷.

나는 속으로 셈을 했다. 펜, 자리, 캔, 프린트. 이걸 어떻게 갚지. 같은 무게로 돌려줘야 청산이 되는데, 나는 누구한테 뭘 해 본 적이 없어서 단위를 몰랐다. 사람한테 친절을 갚는 환율 같은 건, 내 계산기에 없었다.


1교시가 끝나고, 나는 시도했다.

새 펜을 한 자루 꺼내 도하 책상에 올려놨다. "어제 거. 새 거로." 빌린 펜은 돌려줬으니, 한 줄 지움. 그리고 지갑에서 동전을 꺼내 캔 값을 셈해 내밀었다. "캔, 이거."

도하가 동전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픽 웃었다. "에이, 됐어. 그런 거 아니야." 그러고는 동전을 도로 내 책상에 밀어 놨다. 받지 않았다.

나는 잠깐 멈췄다. 이상했다. 빚은 갚으면 끝나는 건데, 갚을 기회를 안 주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균형이 안 맞았다. 한쪽으로 기운 저울이 그대로 멈춰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동전을 다시 내밀었지만, 도하는 손사래를 치며 "진짜 됐어" 하고는 옆 친구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청산은 실패했다.

손바닥에 동전 네 개가 그대로 남았다. 차가운 금속이 손에 배기는데, 나는 그걸 도로 지갑에 넣지 못하고 한참 쥐고 있었다. 갚지 못한 빚은, 손안에서 점점 무거워졌다. 평소의 나라면 이쯤에서 다른 방법을 찾았을 거다. 청소 당번을 대신 서 준다거나, 학생회 권한으로 뭘 편의를 봐 준다거나, 같은 무게의 무언가로 균형을 맞췄을 거다. 그런데 도하의 친절에는 무게가 안 적혀 있었다. 펜 한 자루가 얼마인지는 아는데, 묻지도 않고 좋은 자리를 내주는 마음이 얼마인지는 환산이 안 됐다. 환산이 안 되는 건 갚을 수가 없다. 갚을 수 없는 건, 내 표에서 영영 0이 되지 않는다.

이름 없는 칸은 빚 칸으로도 옮겨지지 않았다. 갚을 수 없는 친절은, 빚이 아니라 그냥 거기 남았다. 나는 처음으로, 내 분류 체계에 들어맞지 않는 게 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인정하는 건 싫었다.


문제는, 내가 이상하게 굴고 있다는 걸 그 애도 눈치챘다는 거였다.

펜을 돌려주고 동전을 내미는, 누가 봐도 사무적인 행동. 도하가 그걸 그냥 넘기지 않았다. 점심시간에 그 애가 의자를 돌려 나를 보며 물었다. "너 왜 그래? 꼭 나한테 뭐 잘못한 사람처럼." 그러고는 한 박자, 나를 빤히 봤다. 평소의 가벼운 눈이 아니라, 뭔가를 읽으려는 눈이었다.

나는 그 시선이 거슬렸다. 도하는 분위기를 잘 읽는 애다. 교실에서 누가 토라졌는지, 누가 시험을 망쳤는지 귀신같이 안다. 하지만 분위기를 읽는 것과 속을 읽는 건 다르다. 그 애는 내가 '평소와 다르다'는 건 알아챘어도, 왜 다른지는 몰랐다. 다행이었다. 왜 다른지는 나도 모르니까, 그 애가 알아내면 나보다 먼저 답을 갖는 셈이 된다. 그건 약점이다.

"아니야." 나는 짧게 끊고 시선을 노트로 내렸다. 차단. 더 보지 못하게.


그런데 그 애가, 어색함을 풀겠다고 한마디를 더 했다.

"아, 맞다." 도하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웃었다. "어제 그 캔 맛있었지? 따뜻한 거."

나는 굳었다.

그 캔은, 내 가방 안에 있었다. 마시지 않은 채로. 어제 나는 그걸 마시면 그 온기를 인정하는 것 같아서, 끝내 따지 않고 가방에 넣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나뿐이어야 했다. 그런데 그 애가 캔 얘기를 꺼내는 순간, 가방 속 캔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마치 들킨 것처럼. 따지도 않은 걸 들고 다니는 게, 안 마셨다는 게, 그게 무슨 뜻인지 그 애가 알아 버릴 것처럼.

"...어." 나는 그렇게만 답했다. 맛있었다고도, 안 마셨다고도 하지 못했다.

도하는 내 짧은 대답에 잠깐 어리둥절하더니, 멋쩍게 뒷머리를 긁었다. "왜, 맛없었어? 다음엔 다른 거 뽑지 뭐." 그 애는 자기가 무슨 말을 잘못 건드렸는지 전혀 몰랐다. 그냥 분위기가 살짝 어긋났다는 것만 느끼고, 그걸 또 친절로 덮으려 했다. 빗나간 친절이었다. 덮으려던 손이 오히려 한 군데를 더 눌렀다.

짧은 침묵이 우리 사이에 떨어졌다. 도하는 그게 어색해서 농담을 하나 더 던졌고, 나는 그게 더 어색해서 노트만 봤다.


그 어색함에, 나는 문을 더 잠갔다.

심장이 뛴 건 아니었다. 얼굴이 달아오른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이건 호감이 아니다. 호감 같은 거였다면 차라리 분류라도 됐을 텐데, 이건 그냥 거슬리는 미결이었다. 갚지도 못하고, 지우지도 못하고, 들킬 뻔하기까지 한. 나는 그 캔을, 그 칸을, '미결' 폴더에 넣고 뚜껑을 덮었다. 덮어도 부피가 줄지는 않았다. 미결은 시간이 지난다고 작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옆에 비슷한 게 하나 더 쌓이면, 같이 커진다.

그리고 그날, 옆에 비슷한 게 하나 더 쌓였다.


종일, 누가 나를 보고 있었다.

어제도 그 감각이 있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어제는 '그런 것 같다'였는데, 오늘은 '확실하다'였다. 착각은 하루를 못 간다. 이틀 연속 같은 자리에서 같은 무게로 느껴진다면, 그건 착각이 아니라 사실이다. 누군가 정말로, 나를 보고 있다.

나는 그 변수를 특정하기로 했다.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면 사라질 시선이니까, 자료를 챙기는 척, 떨어진 지우개를 줍는 척, 교실 뒤편을 빠르게 훑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각도를 바꿔 가며. 출처는 분명 교실 뒤 어딘가, 창가 반대쪽 구석이었다. 그런데 정확히 누구인지는 끝내 잡히지 않았다. 내가 보려는 순간 시선은 이미 거둬졌고, 거기엔 책상에 엎드린 누군가의 등이나, 창밖을 보는 옆얼굴이나, 그런 무심한 풍경만 남았다.

새 반에 전학생이 하나 있다고 했다. 이름은 여전히 기억나지 않았다. 그 시선의 온도가 도하의 것과 다르다는 것만 알았다. 도하의 시선이 환하고 가벼웠다면, 이건 어둡고 무거웠다. 더 조용하고, 더 오래 머물고, 들키지 않으려 더 빨리 거둬지는. 마치 보는 데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 보면 안 되는 걸 보는 사람의 시선 같았다.

변수의 위치는 좁혔는데, 정체는 못 잡았다. 모르는 게 또 하나 늘었다.


하교 무렵, 나는 빈 교실에 잠깐 남았다.

오늘 나는 두 가지를 처리하려 했고, 두 가지 다 실패했다. 도하의 친절은 빚으로 청산하려 했지만 갚을 수가 없었고, 그 시선은 정체를 특정하려 했지만 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모르는 걸 제일 싫어하는데, 오늘 모르는 게 둘이 됐다. 하나는 옆자리에서 웃고, 하나는 등 뒤에서 본다.

가방을 메는데, 안에서 캔이 둔탁하게 흔들렸다. 아직 따뜻하지도 않은, 식어 버린 캔. 나는 그걸 버릴까 하다가, 그냥 뒀다. 버리는 것도 일종의 처리인데, 처리할 마음이 안 섰다. 처리하지 못한 것들은 그렇게 가방 안에, 머릿속 칸에, 등 뒤의 시선에 하나씩 남았다.

친절은 빚인 줄 알았는데, 빚이 아니었다. 빚이라면 갚아서 0으로 만들 수 있는데, 친절은 갚을 수가 없어서 0이 되지 않는다. 갚을 수 없는 건, 줄지 않고 쌓이기만 한다. 첫눈처럼. 영하 4도에서는, 한 번 쌓인 눈은 녹지 않는다. 그날 나는 그걸, 아직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