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은 계산에 안 들어가는 유일한 변수다.
내가 통제 못 하는 게 하나 있다면 날씨다. 그날 저녁, 눈은 예보보다 두 배로 왔다. 하교 시간이 지나도 그치기는커녕 더 굵어졌고, 버스가 끊겼다는 방송이 나왔다. 남은 애들은 하나둘 부모님 차를 기다리거나, 눈을 뚫고 걸어 나갔다. 나는 학생회 마감이 있어 남았다. 동의서 정리, 다음 주 안건, 예산 이월. 남은 일을 다 끝내면 눈도 좀 잦아들 거라고, 나는 그렇게 계산했다.
계산은 틀렸다. 일은 끝났는데 눈은 안 그쳤고, 어느새 그 층엔 나 혼자였다. 아니, 혼자인 줄 알았다.
영하 4도. 창밖은 하얗게 지워졌고, 복도등은 절반만 켜져 있었다. 나는 서류철을 안고 학생회실을 나섰다. 그리고 복도 끝에서, 나는 그 애와 마주쳤다.
정면이었다.
다섯 번을 비껴갔던 그 정면이, 여섯 번째에 하필 이렇게 왔다. 좁은 복도, 텅 빈 층, 나갈 데 없는 눈. 피할 각도가 없었다. 그 애는 사물함 쪽에서 뭔가를 챙기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어두운 눈. 내가 나흘을 쫓고도 못 잡았던, 며칠째 내 등 뒤에 있던 그 눈.
나는 그 얼굴을 처음으로 똑바로 봤다. 그리고 손에 든 서류철 맨 위, 오늘 종일 정리한 이름 하나가 머릿속에서 그 얼굴 위에 겹쳐졌다. 차이안. 2학년 2반. 전학생. 교실 뒤 구석. 나를 보던 시선. 흩어져 있던 점들이, 그 애의 얼굴 앞에서 한 번에 이어졌다.
"차이안."
나는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그 애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굳는 걸, 나는 봤다. 굳는다는 건 맞다는 뜻이다. 아니라면 굳을 이유가 없다.
너였구나. 며칠째 나를 본 게.
나는 이 순간을 위해 나흘을 썼다.
정체만 알면 끝나는 문제라고 믿었다. 모르니까 흔들리는 거고, 알면 안 흔들린다고. 그 시선을 장부에 올려 닫으면, 서랍이 마침내 닫힌다고. 나는 그렇게 계산해 왔다. 그래서 지금, 나는 안도해야 했다. 변수를 특정했으니까. 답을 확인했으니까.
그런데 안도가 안 됐다.
그 애의 얼굴을 아는 순간, 나는 새로운 걸 하나 더 모르게 됐다. 왜. 이 전학생이, 나 같은 사람을, 며칠째 그렇게 봤는가. 나는 누구에게도 특별히 보일 짓을 한 적이 없다. 길 한 번 알려 준 적도 없는, 말 한 번 섞은 적 없는 사이다. 그런데 그 애의 눈은, 처음 보는 사람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오래 알던 걸 조심스럽게 확인하는 눈이었다. 그 온도가, 도하의 것과도 달랐고, 가을의 것과도 달랐다.
'누구'를 아는 건, '왜'를 모른다는 걸 아는 일이었다. 답을 하나 닫으니, 더 큰 문제가 하나 열렸다. 알면 안 흔들릴 줄 알았는데, 알고 나니 더 흔들렸다. 그 믿음이, 그 자리에서 소리 없이 깨졌다.
"...비켜."
그 애가 먼저 입을 열었다. 딱 한 마디. 눈은 이미 바닥으로 내려가 있었다. 방금까지 나를 보던 눈이, 내가 마주 보자 순식간에 거둬졌다. 그건 무뚝뚝함이 아니라 방어였다. 나는 그런 방어를 안다. 나도 매일 치는 거니까. 벽을 치는 사람은, 벽을 한눈에 알아본다.
나는 비켜 주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왜 봤어." 감정을 뺀 목소리로. 취조가 아니라, 그냥 데이터가 필요한 사람처럼.
그 애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 아주 잠깐, 뭔가를 말할 듯 입술이 움직였다가, 다시 다물렸다. 그러고는 서류 봉투 하나를 내 쪽으로 내밀었다. "동의서. 학생회함에 넣으려던 거." 화제를 돌리는 방식이 나와 똑같았다. 곤란한 질문 앞에서 사무적인 걸 내미는 것. 나는 그 봉투를 받았다. 손끝이 스쳤다. 그 애의 손도 나만큼 차가웠다.
답은, 그 차가운 손끝까지였다. 그 너머는 안 열렸다.
그 애는 나를 지나쳐 계단 쪽으로 갔다.
눈이 이렇게 오는데 어디로 가느냐고, 나는 묻지 않았다. 물을 자격이 없었다. 나도 이 애가 왜 나를 봤는지 안 알려 주면 모르는 것처럼, 이 애도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나한테 알려 줄 이유가 없다. 우리는 서로의 절반만 아는 사이가 됐다. 얼굴은 아는데 이유는 모르고, 이름은 아는데 마음은 모르는.
그 애가 사라진 복도 끝을, 나는 한참 봤다. 서류철을 안은 팔에, 방금 받은 봉투가 얹혀 있었다. 차이안이라는 이름이 두 번 적힌 종이. 나는 그 이름을 이제 얼굴과 함께 안다. 그런데 아는 게 늘어날수록, 모르는 것도 같이 늘어난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이 교실은, 이 학교는,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게 많아지는 곳이었다.
그 애가 간 반대쪽, 미술실 복도 끝에서도 인기척이 있었다.
돌아보니 도하였다. 이 시간까지 학교에 남아, 별 이유도 없이 그 복도를 서성이고 있었다. 그 복도 끝 창가엔, 오늘도 가을이 있었다. 눈 오는 창밖을 그리는 중이었다. 도하는 그 애한테 다가가려는 듯 한 발을 뗐다가, 멈췄다. 손에 든 뭔가를 빙글빙글 돌리기만 했다. 늘 누구한테나 쉽게 말을 걸던 애가, 딱 한 사람 앞에서 목이 막혀 있었다. 나는 그걸 멀리서 봤다.
가슴의 가시가, 또 욱신했다. 이번엔 정말 인정할 뻔했다. 저 애가 저러는 이유를 나는 아니까, 내가 왜 아픈지도 사실은 아니까. 그런데 나는 또, 마지막 순간에 눈을 돌렸다. 오늘 밤엔 이미 모르는 게 하나 늘었다. 여기서 또 하나를 인정하면, 서랍이 아니라 내가 부서질 것 같았다. 나는 그 인정을, 오늘도 유예했다.
집으로 가는 눈길은 미끄러웠다.
나는 서류철과 봉투를 가방에 넣었다. 안에서 식은 캔이 봉투에 부딪혔다. 미결이 넷에서 다섯으로 늘었다. 안 마신 캔, 청산 못 한 친절, 인정 안 한 가시, 그리고 이제 '차이안은 왜 나를 보나.' 나는 미결을 못 견디는 사람인데, 요즘 나는 미결을 늘리는 재주만 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의 미결은 무겁기만 한 게 아니었다. 정체를 알게 된 그 시선은, 이제 무섭지 않았다. 그냥 궁금했다. 무서운 것과 궁금한 것은 다르다. 무서운 건 피하고 싶고, 궁금한 건 알고 싶다. 나는 며칠째 그 시선을 피하려 했는데, 오늘 처음으로, 그걸 알고 싶어졌다. 왜인지는, 또 안 따졌다. 따지면 분간 안 되는 칸이 하나 더 늘 테니까.
이상한 밤이었다. 나는 오늘, 남의 이유는 알고 싶어졌는데 내 이유는 여전히 안 보려 했다. 차이안이 왜 나를 보는지는 궁금하면서, 내가 왜 도하 쪽으로 자꾸 눈이 가는지는 끝까지 안 물었다. 남의 미결은 풀고 싶고, 내 미결은 덮고 싶은 것. 어쩌면 그게 얼음공주가 얼음공주인 이유였다. 남의 마음은 관찰할 수 있어도, 자기 마음은 관찰 대상이 아니니까. 관찰자는 늘, 자기만 빼고 다 본다.
영하 4도. 눈은 밤새 왔다. 정면은 이제 비껴가지 않는다. 한 번 마주 선 사람은, 다음에도 마주 선다. 그게 무섭지 않고 궁금해진 순간부터, 사실 나는 이미 반쯤 문을 연 거였다. 그걸 그날의 나는, 여전히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