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miael Studio
작품 소개로9화 · 소설

안 온 것

이안이 서류를 내기로 한 '다음 주'가 왔다. 담당인 이서는 그 전학 신청서가 접수되면 이안의 떠남이 확정된다는 걸 안다. 그런데 이안은 또 미룬다. 서류는 안 온다. 미결을 못 견디던 이서가, 그 서류가 안 온 것에 처음으로 안도한다. 그 안도를 이서는 '아직 왜를 풀 시간을 벌었다'로 덮는다. 한편 도하는 처음으로 그림 완성을 명분 삼아 가을에게 진짜 다가가지만, 또 목이 막혀 반 마디도 못 하고 물러선다.

미결을 못 견디는 사람이, 미결이 안 풀려서 다행이라고 느낀 날이 있었다.

그날이 오늘이다. 나는 그날의 나를, 아직도 다 이해하지 못한다.


'다음 주'가 왔다.

지난주에 그 애가 남긴 말이었다. 전학 신청서, 다음 주까지 낼게. 나는 그 말을 장부에 적어 뒀다. 미결에 시한이 붙은 그날부터, 나는 이 '다음 주'를 며칠 내내 셈했다. 그 서류가 접수되면 그 애의 떠남이 행정적으로 확정된다. 담당자인 내 손으로, 나는 그 애가 사라지는 걸 서류로 확인하게 된다. 안 내면, 아직 유예다.

나는 학생회실 접수함이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담당자는 접수를 기다리는 자리에 있는 게 맞다. 그건 규칙이고, 규칙은 나한테 방패다. 나는 오늘 이 방패 뒤에 앉아, 그 서류를 기다렸다.

그런데 나는, 기다리면서 이상한 걸 느꼈다.


이 서류만은, 오늘 안 왔으면 싶었다.

미결을 못 견디는 내가, 그 미결을 닫아 줄 서류가 안 오길 바랐다.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늘 미결이 빨리 정리되길 바라는 사람인데, 유독 이 건만은 정반대였다. 서류가 오면 다 닫히는데, 나는 그 닫힘이 싫었다.

나는 그 마음에 곧바로 각주를 달았다. 아직 검토할 게 남아서다. 미비 서류는 원래 꼼꼼히 봐야 하고, 성급하게 접수하면 나중에 문제가 생긴다. 그러니 지금 접수가 안 되는 건 오히려 절차상 안전하다. 초조한 게 아니라 책임감이다. 나는 그렇게 정리했다. 그렇게 정리하면 이 모순은 업무의 일부처럼 보였다. 나는 그 위장 뒤에 앉아, 문 쪽을 필요 이상으로 자주 봤다.

한 번, 두 번, 세 번. 문이 열릴 때마다 나는 그 애일까 봤고, 그 애가 아닐 때마다 안심했다. 안심. 그 단어가 내 안에서 튀어나올 때마다, 나는 못 들은 척했다. 관찰자는 남의 감정에는 이름을 잘 붙이면서, 자기 감정에는 자꾸 못 들은 척을 한다.


하루가 다 가도록, 서류는 안 왔다.

종례 시간이 지나고, 접수 마감이 지났다. 나는 접수함을 열어 봤다. 다른 서류 몇 장은 있었는데, 전학 신청서는 없었다. 차이안이라는 이름이 적힌 그 종이는, 오늘 오지 않았다. 그 애는 또 미뤘다. '다음 주'라던 약속을, 다음 주가 온 오늘 또 안 지켰다.

나는 빈 접수함을 한참 봤다. 그리고 그때, 나는 내 안에서 아주 분명한 감정 하나가 올라오는 걸 느꼈다.

다행이었다.


다행. 나는 그 단어 앞에서 멈췄다.

미결을 못 견디는 사람이, 미결이 안 풀린 걸 다행이라고 느꼈다. 이건 내 원칙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일이었다. 나는 평생, 안 닫힌 서랍 하나에 밤새 뒤척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서랍이 안 닫힌 걸 다행이라고 느꼈다. 왜.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을 관찰 대상으로 올렸다. 늘 남만 관찰하던 눈을, 처음으로 나한테 돌렸다. 한이서, 너는 지금 왜 안도하고 있어. 그 애가 안 떠나서? 아니면 네가 아직 그 애의 '왜'를 못 풀어서?

나는 재빨리 후자를 골랐다. 그래, 아직 왜를 못 풀었으니까. 그 애가 떠나면 나는 그 미결을 영영 못 닫는다. 그러니 그 애가 안 떠난 건, 내가 미결을 풀 시간을 번 거다. 나는 청산할 기회가 남아서 다행인 거다. 그게 이유다. 다른 이유는 없다.

나는 그렇게 덮었다. 스스로에게 붙인 각주 위에, 또 각주를 붙였다. 그런데 각주를 붙이는 손이, 조금 급했다. 진짜로 그게 다라면, 이렇게 급하게 덮을 필요가 없었을 텐데. 나는 그 급함까지는, 못 본 척했다.


집에 가서도, 나는 그 다행을 몇 번이나 다시 꺼내 봤다.

나는 남의 감정은 데이터로 읽는다. 저 애가 왜 저러는지, 어떤 표정이 무슨 뜻인지, 나는 관찰과 추론으로 거의 정확히 맞힌다. 얼음공주라는 별명이 그래서 붙었다. 남의 속은 다 읽으면서 자기 속은 안 내주는 애. 그런데 오늘 처음 알았다. 자기 속을 안 내주는 게 아니라, 자기 속은 애초에 못 읽는 거였다. 남의 감정에는 이름표가 붙어 있어서 읽기 쉬운데, 내 감정에는 이름표가 없다. 안에서 올라오는 이 뜨끈한 게 안도인지, 아쉬움인지, 다른 무엇인지, 나는 판정할 데이터가 없었다. 나 자신에 대해서만은, 나는 관찰자가 아니라 그냥 눈먼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감정을 가장 안전한 서랍에 넣었다. '미결 청산 지연에 따른 안도.' 그렇게 이름표를 만들어 붙이면, 그건 업무 감정이 되고, 업무 감정은 안 위험하다. 나는 늘 이렇게 산다. 이름을 못 붙일 것 같으면, 붙일 수 있는 가장 사무적인 이름을 억지로 만들어 붙인다. 그러면 서랍은 닫힌다. 닫힌 것처럼 보인다. 안에서 뭐가 자라는지는, 서랍을 안 여니까 모른다.


복도에서, 나는 그 애와 스쳤다.

일부러 찾아간 게 아니었다. 능동적으로 다가가 '왜 서류를 또 미뤘어'라고 물을 용기는, 나한테 없었다. 그건 계산 밖의 행동이고, 얼음 장막이 가장 세게 누르는 수였다. 그래서 나는 그냥, 마주친 김에 담당자로서 한마디 했다. "서류, 오늘도 안 왔더라." 감정을 뺀 목소리로.

그 애는 나를 잠깐 봤다가, 곧 시선을 거뒀다. "...아직 정리가 덜 됐어." 짧았다. 딱딱했다. 필요한 최소한의 음절만. 그러고는 지나갔다.

나는 그 애가 지나간 자리에서, 문득 하나를 알아챘다.

이 애는, 유독 나한테만 이렇게 딱딱했다. 나는 그 애가 다른 애들이랑 있는 걸 몇 번 봤다. 말수는 적어도, 나한테처럼 이렇게 음절을 세듯 아끼지는 않았다. 그런데 내 앞에서만, 그 애는 말이 반으로 줄고 온도가 반으로 내려갔다. 왜. 왜 나한테만.

무례한 걸까. 아니면 경계하는 걸까. 나를 특별히 싫어하는 걸까. 아니면 그 반대인 걸까. 나는 그 반대의 가능성 앞에서 잠깐 멈췄다가, 곧 지웠다. 그건 근거 없는 추측이고, 나는 근거 없는 추측을 안 하는 사람이니까. 그 애가 왜 나한테만 그러는지, 그것도 결국 안 풀린 미결 하나로 서랍에 넣었다. 이 애 앞에서는, 미결이 줄기는커녕 자꾸 는다.


미술실 쪽 복도를 지날 때, 나는 오늘도 그 그림을 봤다.

가을은 창가에서 설경을 그리고 있었다. 며칠째 그리던 그 그림이, 오늘은 거의 다 완성돼 있었다. 흰색과 회색만으로 채운 눈밭이, 종이 위에서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그 애는 마지막 결을 다듬느라, 세상 아무것도 안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도하가 있었다.

오늘 도하는 달랐다. 늘 멀찍이서 옆모습만 보던 애가, 오늘은 가을의 등 뒤 몇 걸음까지 다가가 있었다. 손에는 뭘 들고 있지도 않았다. 그림이 다 됐다는 걸 핑계 삼아, 드디어 말을 걸려는 것 같았다. 그 애가 입을 열었다. 나는 멀리서 그 입 모양을 봤다. 무슨 말이 나오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안 나왔다.

도하의 입이, 반쯤 열렸다가 그대로 굳었다. 말이 목에 걸려서, 반 마디도 못 나왔다. 늘 누구한테나 쉽게 말을 걸던 애가, 딱 한 사람 등 뒤에서 결국 아무 소리도 못 냈다. 그러고는, 들킬까 봐 그랬는지, 소리 없이 반 걸음 물러섰다. 가을은 끝까지 몰랐다. 그림에 빠진 그 애는, 등 뒤에 누가 왔다 갔는지도 몰랐다. 다가간 사람은 아무 말도 못 했고, 다가간 걸 받은 사람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 사이에서, 나 혼자 그걸 다 봤다.

가슴의 가시가, 오늘 제일 깊이 욱신했다.


나는 그 욱신함의 이름을, 오늘도 안 붙였다.

이상한 건, 오늘은 그 가시가 평소랑 결이 달랐다는 거다. 평소엔 도하가 가을을 볼 때 아팠다. 오늘은 도하가 말을 못 걸어서 아팠다. 저 애가 저렇게까지 다가가 놓고도 한마디를 못 하는 게, 그 애가 딱하기도 하고, 그런데 그 딱함 아래 다른 게 또 있었다. 그 자리에 내가 없어서 아픈 것. 도하가 저렇게 애타는 상대가 내가 아니라서, 그리고 앞으로도 아닐 거라서. 나는 그 아래층까지 내려가려다, 또 계단에서 멈췄다.

멈춘 이유는 늘 같았다. 내려가면 인정해야 하고, 인정하면 서랍이 아니라 내가 열린다. 오늘은 이미 미결이 하나 더 늘었고, 안 온 서류에 안도한 나까지 있었다. 여기서 가시까지 인정하면, 하루에 나를 두 번 여는 셈이었다. 나는 그렇게까지 헤프게 열리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오늘도, 인정을 유예했다.


그 도하가, 조금 뒤에 나를 불렀다.

방금 아무 말도 못 하고 물러선 애가,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얼굴로 다가왔다. "야, 한이서. 이거." 또 이름 없이, 따뜻한 캔 하나. "너 오늘 학생회 마감이었지. 이거 마셔." 방금 가을 앞에서 목이 막혔던 그 입으로, 나한테는 이렇게 쉽게 말을 걸었다.

나는 그 캔을 받았다. 가방 안에 안 마신 캔이 벌써 둘 있었다. 오늘 셋이 됐다. 나는 받은 걸 못 버리는 사람이라, 이 캔들은 마시지도 버리지도 못한 채 쌓이기만 한다. 이름 없는 칸이 또 하나 늘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캔이,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도하는 가을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 하면서, 나한테는 이렇게 쉽게 온기를 준다. 그게 뭘 뜻하는지 나는 안다. 그 애한테 나는, 목이 막히는 상대가 아니라는 뜻이다. 아무렇지 않게 캔을 건넬 수 있는 사람. 특별하지 않은 사람. 나는 그걸 안도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오늘도 판단을 미뤘다.


집으로 가는 길, 오늘 안 온 것들을 세어 봤다.

이안의 서류가 안 왔다. 그 애의 떠남은 오늘 확정되지 않았고, 나는 그걸 다행이라고 느꼈다. 도하의 한마디가 가을에게 안 갔다. 그 애의 마음은 오늘도 목에서 걸려 못 나갔다. 그리고 하나 더. 내 안에서, 오늘 종일 안 온 게 하나 있었다.

나는 그게 뭔지 알 것도 같았는데, 끝까지 이름을 안 붙였다. 다들 뭔가를 못 내고, 못 걸고, 못 붙이는 하루였다. 이안은 서류를 못 냈고, 도하는 말을 못 걸었고, 나는 인정을 못 붙였다. 우리는 다 각자의 '다음 주'를 미루는 사람들이었다. 남의 미룸은 그렇게 잘 보이는데, 내 미룸만은 오늘도 안 보였다.

영하 4도. 눈은 안 왔고, 길은 여전히 얼어 있었다. 어떤 서류는 오늘 안 왔고, 그래서 어떤 사람은 아직 안 떠났다. 나는 안 떠난 그 사람이 다행이라고 느꼈으면서도, 왜 다행인지는 끝까지 안 물었다. 물으면 안 닫힌 서랍이 하나 더 생길 테니까. 그런데 안 물어서 안 생긴 게 아니라, 안 물어서 더 커진 거라는 걸, 그날의 나는 여전히 몰랐다. 안 온 것은, 안 왔다고 없는 게 아니었다. 그저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