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miael Studio
작품 소개로5화 · 소설

손에 든 답

개학 셋째 주. 부회장 이서에게 전학생 적응 서류가 떨어진다. 이서는 그 서류에서 전학생 이름 '차이안'을 알게 되고, 그가 자기를 보던 시선의 주인일 거라 강하게 의심한다. 그런데 효율을 핑계로 대면을 회피하고, 이안도 선제 회피해, 둘은 끝내 안 마주친다. 답이 손에 들어왔다 나간다.

미결을 세 개나 쌓아 두고 잠든 밤은, 잠이 얕다.

안 마신 캔. 어제 박힌 이름 없는 가시. 그리고 네 번이나 추적하고도 못 잡은 시선. 나는 그 셋을 머릿속 같은 서랍에 넣고 잤는데, 서랍은 닫히지 않았다. 닫히지 않은 서랍은 밤새 덜컹거린다. 나는 그 소리에 몇 번이나 깼다.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한 일은, 그 셋 중 하나라도 오늘 닫겠다고 결심한 거였다. 제일 만만한 건 시선이었다. 캔과 가시는 도하와 얽혀 있어 복잡하지만, 시선은 그냥 누구인지 특정만 하면 끝나는 문제다. 정체만 알면, 그 변수는 장부에 올라가고, 올라간 변수는 더 이상 나를 흔들지 못한다. 모르니까 흔들리는 거다. 알면 안 흔들린다. 나는 그렇게 믿었다.

영하 4도. 오늘은 그 믿음이 시험받는 날이었다. 다만 나는, 시험 문제가 내 손에 직접 들어올 줄은 몰랐다.


1교시 전에, 담임이 나를 불렀다.

"부회장, 이거 좀." 담임은 서류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전학생 적응 관련. 학생회에서 챙기기로 한 거. 안내문이랑 동의서 전달하고, 빠진 거 있으면 받아 와." 학기 초 부회장한테 흔히 떨어지는 잡무였다.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거절은 빈틈이고, 빈틈은 잡힌다. 받는 게 늘 더 안전하다.

봉투를 받아 자리로 돌아오면서, 나는 안에 든 서류를 훑었다. 전학생 인적사항이 맨 위에 있었다. 이름 한 칸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차이안.

2학년 2반. 전학 일자, 전 학교, 비상연락처. 데이터는 깔끔했다. 나는 그 이름을 한 번 읽고, 두 번 읽었다. 두 번째로 읽을 때, 머릿속에서 뭔가가 맞물리려 했다. 전학생. 우리 반. 교실 뒤 구석. 나를 보던 그 어두운 시선. 위치가 겹쳤다. 정황이 겹쳤다. 어쩌면 이 이름이, 내가 나흘을 쫓고도 못 잡은 그 시선의 주인일지도 모른다.

손에 답이 들어온 것 같았다. 이름 석 자가, 종이 위에.


그런데 이상하게, 나는 그 다음 걸음을 안 디뎠다.

확인하려면 간단했다. 이 서류를 핑계로 그 애한테 직접 가면 된다. "차이안 학생?" 하고 부르고, 얼굴을 보고, 명찰을 보고, 그 자리가 교실 뒤 구석인지 확인하면 끝난다. 부회장이 전학생한테 학생회 서류를 전하는 건 누가 봐도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 김에 정체를 특정하는 건 일도 아니다. 일 초면 된다.

나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나는, 효율을 따졌다. 직접 만나서 전하는 것보다, 그 애 책상에 봉투를 넣어 두고 동의서만 회수하는 게 동선이 짧다고. 쉬는 시간에 사람 많을 때 굳이 불러 세우는 건 비효율이라고. 메모 한 장 붙여 두면 알아서 작성해 낼 거라고. 나는 그렇게 계산했고, 그 계산은 깔끔했다. 너무 깔끔해서, 나는 그게 계산인지 회피인지 분간하지 않았다.

분간 안 되는 건 위험하다고, 나는 늘 말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위험을 일부러 안 봤다. 직접 그 애 얼굴을 확인하는 게, 왜인지 내키지 않았다. 그 이유를 따지면 또 분간 안 되는 칸이 하나 늘 것 같아서, 나는 따지지 않았다.


쉬는 시간, 나는 봉투를 들고 교실 뒤로 갔다.

그 자리는, 또 비어 있었다. 차이안의 자리로 추정되는 교실 뒤 구석. 주인은 없었다. 책상 위엔 흔적도 거의 없었다. 누가 오래 쓴 자리가 아니라, 언제든 뜰 수 있게 비워 둔 자리 같았다. 나는 봉투를 그 위에 놓고, 메모를 붙였다. '동의서 작성 후 학생회함에. 부회장.' 딱 그만큼.

봉투를 내려놓는 순간, 나는 그 이름과 그 빈자리가 같은 사람이라는 걸 거의 알았다. 이름은 손에 있고, 자리는 눈앞에 있었다. 둘을 잇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 나는 또, 잇기 직전에 손을 뗐다. 얼굴을 못 봤으니 확정할 수 없다고, 스스로에게 핑계를 댔다. 확정하지 않으면 장부에 못 올리고, 장부에 못 올리면 미결인데. 나는 그 미결을 닫을 수 있는데도, 닫지 않았다. 닫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사실이, 또 답이었다. 나는 그 답도 안 봤다.

답을 손에 들고도 안 보는 사람을, 나는 멍청하다고 생각해 왔다. 오늘 그 멍청한 사람이 나였다.


자리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도하를 봤다.

그 애는 자기 자리에 없었다. 쉬는 시간이면 늘 친구들 한가운데 있던 애가, 혼자 복도 끝 미술실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별 이유도 없이. 농구 얘기를 하다 말고, 뭔가에 이끌리듯. 나는 그 동선이 이상해서 눈으로 좇았다. 그리고 그 복도 끝에, 가을이 있었다. 창가에서 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도하의 시선이, 거기 또 머물렀다.

어제처럼 한 박자가 아니었다. 오늘은 그 애가 일부러 그쪽으로 걸어갔고, 도착해서 한참을 봤다. 말은 못 걸었다. 그냥 멀찍이 서서, 그 옆모습을 봤다. 어제는 우연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오늘은 우연이 아니었다. 두 번이면 패턴이다. 세 번 넘게 가면 대상이라고, 내가 가을한테서 배운 그대로. 도하는 이제, 가을을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가슴의 가시가, 다시 욱신했다. 어제보다 더 깊이.


나는 그 욱신함의 정체를, 거의 잡을 뻔했다.

도하가 누굴 보든 내 알 바 아니어야 하는데, 왜 아픈지. 가을이 전학생을 봤을 땐 아무렇지 않았는데, 왜 도하가 가을을 보는 건 견디기 힘든지. 답은 사실 하나뿐이었다. 너무 단순해서, 나 같은 사람도 한 번에 풀 수 있는 식이었다. 도하가 가을을 보는 게 아픈 건, 내가 도하를……

거기서 나는, 펜을 떨어뜨리듯 그 생각을 떨어뜨렸다.

아니다. 추워서다. 복도가 외풍이 세다. 어제부터 추적하느라 신경이 곤두서서, 감정이 과민해진 거다. 과민한 감정은 오작동을 일으킨다. 이건 오작동이다. 나는 그 식을 끝까지 풀지 않고, 마지막 한 줄을 남겨 둔 채 공책을 덮었다. 답이 한 줄 남았는데, 그 한 줄을 안 적었다. 적으면 인정이 되니까. 인정하면, 무너지니까.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답을 무서워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숫자는 늘 답을 줬고, 나는 그 답이 아무리 나빠도 똑바로 마주했다. 내신이 떨어지면 떨어진 대로, 예산이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답을 아는 게 모르는 것보다 늘 나았다. 그런데 이 식만은, 답을 아는 게 모르는 것보다 무서웠다. 풀면 안 되는 문제가 세상에 있다는 걸,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그리고 풀면 안 되는 문제일수록 답은 더 빤히 보인다는 것도, 그날 처음 알았다.

한 끗이었다. 나는 그 한 끗 앞에서, 또 비껴섰다.


하교 무렵, 나는 학생회함을 확인했다.

차이안의 동의서가, 작성돼서 들어와 있었다. 글씨는 반듯했고, 빈칸 하나 없이 채워져 있었다. 나는 그 서류를 한 번 더 봤다. 끝내 얼굴 한 번 못 본 사람의, 반듯한 글씨만. 이 글씨의 주인이 나를 며칠째 보고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그 사람과 오늘 하루 종일 같은 교실에 있었으면서, 한 번도 정면으로 마주 서지 않았다. 서류는 오갔고, 이름은 손에 들어왔고, 자리는 눈앞에 있었는데. 정면만, 비껴갔다.

가방을 멨다. 안에서 캔이 둔탁하게 흔들렸다. 안 마신 캔, 못 닫은 미결, 인정 안 한 가시, 확인 안 한 시선. 미결이 셋에서 넷으로 늘었다. 나는 모르는 걸 제일 싫어하는 사람인데, 오늘은 알 수 있는 것까지 일부러 모르는 채로 뒀다. 그게 오늘의 나였다.

영하 4도. 눈은 또 내렸다. 답을 손에 들고도 안 본 날 위에, 새 눈이 또 쌓였다. 정면은 오늘도 비껴갔지만, 비껴간 정면은 사라지지 않는다. 비껴간 만큼, 다음엔 더 가까이서 온다. 그게 마지막 비껴섬이었다는 걸, 그날의 나는 끝내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