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miael Studio
작품 소개로8화 · 소설

미뤄둔 것

학생회 업무로 이서가 하필 전학생 차이안의 '전학 서류 미비 확인'을 맡는다. 업무라는 방패 뒤에서 이서는 '왜'를 캐려 하지만, 이안은 감정을 완벽히 숨긴다. 대신 미제출 서류를 얼버무리는 과정에서, 이서는 '이 애가 곧 떠날 사람'이라는 정황을 읽어낸다. WHY(이유)와 이안의 속마음은 여전히 봉인. 미결이 '왜 보나'에서 '언제 사라지나'로 커지며, 처음으로 시한이 붙는다.

미결을 못 견디는 사람에게 가장 잔인한 말은 '나중에'다.

나는 그 말을 오늘 처음으로, 남의 입에서 들었다. 내가 평생 남한테 한 번도 안 써 본 말을. 그리고 그 말이 이렇게 사람을 흔들 수 있다는 걸, 나는 오늘 처음 알았다.


일은 우연처럼 왔지만, 나는 그게 우연이 아니길 바랐던 것 같다.

학생회 정기 업무 중에 전입생 서류 정리가 있다. 학기 중 전학 온 학생의 제출 서류가 다 갖춰졌는지 확인하고, 미비한 항목을 본인에게 통지해 채우는 일. 그날 배정표에 이름이 하나 떴다. 차이안. 2학년 2반. 담당, 한이서.

나는 그 배정표를 한참 봤다. 피하려고 나흘을 쓰고, 관찰만 하겠다고 하루를 버티고, 닫힌 문 앞에서 돌아섰던 그 애를, 이번엔 학교가 내 앞에 데려다 놓았다. 그것도 내가 가장 편한 자리에. 업무라는 자리에.

업무는 방패다. 나는 이 방패 뒤에서라면 그 애 정면에 설 수 있다. 서류 미비를 확인하는 건 내 권한이고, 여기서 내가 몇 가지를 더 물어도 그건 사적인 접근이 아니라 절차다. 얼음 장막을 한 올도 흐트러뜨리지 않고, 나는 그 애에게 다가갈 명분을 손에 쥐었다. 며칠째 못 채운 '왜'의 칸을, 어쩌면 오늘 채울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조금 들떴던 것 같다. 인정하긴 싫지만.


방과 후, 빈 교실에서 그 애를 마주 앉혔다.

나는 서류철을 펴고, 사무적인 얼굴을 준비했다. 이건 취조가 아니라 확인이다. 감정을 뺀 목소리, 또박또박한 문항. 나는 이 톤을 잘 안다. 이 톤 안에 있으면 나는 안전하다.

"전입 서류 중에 미비 항목이 몇 개 있어. 확인하고, 안 낸 건 채우면 돼."

그 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만큼. 어제 복도에서처럼 눈을 아예 안 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주치지도 않았다. 서류 위 어딘가, 안전한 중간 지점에 시선을 뒀다. 나는 그 애를 관찰했다. 말로 묻지 않아도 되는 자리니까, 나는 눈으로 물었다. 손끝의 떨림, 눈꺼풀의 각도, 숨의 간격. 왜 나를 봤는지, 그 답이 이 얼굴 어딘가에 적혀 있을 거라고, 나는 여전히 믿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 읽혔다.


노려서 관찰하면, 오히려 안 잡힌다는 걸 나는 오늘 배웠다.

그 애는 완벽하게 침착했다. 어제의 무표정과는 달랐다. 어제는 벽을 세게 쳐서 티가 났다면, 오늘은 벽이 있는지도 모르게 잔잔했다. 손끝은 안 떨렸고, 목소리는 사무적이었고, 문항 하나하나에 필요한 만큼만 답했다. 내가 아무리 눈을 돌려도, 그 애 표정에서는 어제 봉투를 내밀던 그 온도가 안 나왔다. 감정이 있었다면 숨긴 거고, 없었다면 애초에 내가 잘못 본 거다. 나는 어느 쪽인지도 판단할 수 없었다. 관찰자가 판단할 데이터를 못 얻는 것. 그건 나한테 작은 굴욕이었다.

정면으로 마주 앉아서, 나는 며칠 전 복도에서보다 더 멀리 있는 그 애를 봤다. 가까이 있을수록 안 잡히는 사람이 있다. 그 애가 그랬다.

나는 관찰을 접기로 했다. 얻을 게 없는 관찰은 그냥 실례니까. 남은 문항을 사무적으로 마저 넘겼다.

그런데 관찰을 접자, 오히려 작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목적을 갖고 노려볼 땐 안 잡히던 것들이, 목적을 놓자 그냥 보였다. 그 애가 서류를 넘기는 손. 손톱 옆에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펜을 쥐는 법이 조금 특이했다. 오래 뭔가를 쓰거나 그려 온 사람의 손이었다. 서류를 짚는 손끝이 나만큼 차가운 것도 다시 보였다. 폭설 저녁에 봉투를 건네던 그 손끝. 그때는 추워서 그런 줄 알았는데, 오늘 따뜻한 교실에서도 그 애 손은 차가웠다. 이 애는 원래 손이 찬 사람이었다.

그 애가 내민 서류 몇 장은, 가장자리가 닳아 있었다. 여러 번 접었다 편 자국, 가방에 오래 넣고 다닌 흔적. 낼 서류를 이렇게 오래 들고만 다니는 사람은, 낼 마음이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이다. 나는 그걸 그냥 서류 상태로만 넘겼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그 순간엔 아직 읽지 못했다.

나는 그 사소한 것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고 있었다. '왜'를 캐려던 관찰은 실패했는데, 정작 캘 생각 없던 것들은 자꾸 눈에 담겼다. 나는 그게 관찰인 줄 알았다. 관찰이 아니라 그냥 그 애를 보고 있는 거라는 걸, 나는 그때 몰랐다. 관찰에는 목적이 있고, 보는 데는 목적이 없다. 나는 목적 없이 사람을 본 적이 거의 없는 사람인데, 그날 나는 목적 없이 그 애를 오래 봤다.

그리고 마지막 항목에서, 예상 못 한 데서 그 애가 걸렸다.


"이 항목, 전학 신청서. 이게 아직 미제출이야."

내가 그 종이를 짚자, 그 애의 침착함에 처음으로 아주 작은 균열이 갔다.

"...그건 나중에 낼게."

나중에. 그 애가 그 말을 하는 데 반 박자가 늦었다. 지금까지 필요한 만큼만 또박또박 답하던 리듬이, 그 항목 앞에서 한 번 엇나갔다. 나는 그 반 박자를 놓치지 않았다. 얼굴은 아무것도 안 읽혔는데, 이 종이 한 장 앞에서 그 애의 박자가 흔들렸다.

"기한이 지났어. 왜 안 냈어."

나는 업무 톤으로 물었다. 이건 정당한 질문이다. 담당자가 미제출 사유를 확인하는 건 절차다. 그런데 그 애는 대답 대신 화제를 돌리려 했다. "다른 건 다 냈잖아. 그거 하나 가지고." 서류 항목 안으로 도로 숨으려는 것. 나와 똑같은 방식. 곤란하면 사무적인 걸 방패로 드는 것.

그런데 오늘은 그 방패가 제대로 안 세워졌다. 얼버무림이 조금씩 길어졌다. 안 낸 이유를 대는 대신, 안 내도 되는 이유를 대려다, 그 애는 자꾸 말을 덧댔다. 그리고 덧대는 말들 사이로, 나는 안 물어본 걸 읽고 말았다.


이 애는, 곧 떠날 사람이었다.

전학 신청서를 미루고 있다는 것. 그 미룸의 결이 그냥 게으름이 아니라는 것. 서류 몇 줄의 상태와, 그걸 얼버무리는 그 애의 박자와, '나중에'라는 그 말의 온도를 다 합치자, 하나의 그림이 떴다. 이 애는 여기 오래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온 지 얼마 안 된 전학생이, 이미 다시 떠날 준비를, 어딘가에서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서류를 못 낸 게 아니라 안 낸 거였다. 내면 확정되는 것이고, 안 내면 아직 유예되는 것이니까.

나는 손끝이 잠깐 식는 걸 느꼈다.

며칠째 나를 붙잡은 미결은 '왜 나를 보나'였다. 그런데 그 미결이 방금, 훨씬 더 큰 걸로 바뀌었다. 왜 나를 보나, 가 아니라, 곧 사라질 사람이 왜 나를 봤나. 언제 사라지나. 내가 그 '왜'를 미처 못 풀었는데, 그 답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 곧 여기서 없어질 거라는 것.

미결을 못 견디는 사람에게, 그 미결에 시한이 붙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미결을 늘 서랍에 넣고 잠가 두는 사람이지, 서둘러 푸는 사람이 아니었다. 급할 게 없었으니까. 미결은 도망 안 가니까. 내일 풀어도 되고 모레 풀어도 되는 거였다.

그런데 이 미결은 도망갈 수 있었다. 그 애가 떠나면, 나는 영영 '왜'를 못 풀게 된다. 서랍에 안 잠긴 채로, 빈칸으로, 그 칸은 평생 남을 거였다. 나는 그런 걸 못 견딘다. 그 사실이, 처음으로 나를 초조하게 했다. 천천히 해도 된다고 믿어온 내가, 처음으로 '더 늦기 전에'를 생각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사람을 사물처럼 정리하는 버릇이 있다. 누가 어떤 사람인지, 무슨 온도인지, 나한테 무슨 칸인지. 한 번 정리해서 서랍에 넣으면, 그 사람은 내 안에서 안 변한다. 도하는 '이름 없는 칸'이고, 가을은 '거울 같은 애'고, 이 전학생은 며칠 전까지 '나를 보는 시선'이었다. 나는 그렇게 정리해 두면 마음이 놓이는 사람이다. 정리된 건 안 흔들리니까.

그런데 곧 떠날 사람은, 정리가 안 된다. 서랍에 넣어도, 그 서랍째로 사라질 사람이니까. 나는 그 애를 어느 칸에 넣어야 할지 몰랐다. '곧 없어질 칸'이라는 서랍은 나한테 없었다. 있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정리한 사람들은 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으니까. 처음으로, 정리해 봤자 소용없는 사람이 내 앞에 앉아 있었다. 그게 이상하게 사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사라질 걸 아는 사람은, 사라지기 전에 봐 둬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그 기분에 이름을 안 붙였다.

그 초조함이 얼굴에 났던 모양이다. 서류를 짚은 내 손끝이, 나도 모르게 한 번 흔들렸다.


그 애가 그걸 봤는지는, 또 모른다.

그 애는 내 흔들린 손끝을 내색 없이 받아넘겼다. "그거, 다음 주까지 낼게." 처음으로 기한을 스스로 말했다. 아까 '나중에'라던 게, 지금 '다음 주'가 됐다. 그게 나를 안심시키려는 건지, 그냥 이 자리를 끝내려는 건지, 나는 판단할 수 없었다. 그 애는 끝까지 자기 감정은 한 올도 안 내줬다. 내준 건 서류의 정황뿐이었다. 마음은 봉인하고, 사실만 흘린 사람. 어제는 얼굴은 보여주고 이유는 숨기더니, 오늘은 곧 떠난다는 건 들키고 왜 떠나는지는 숨겼다. 이 애는 늘, 딱 절반씩만 열었다.

나는 또 절반만 아는 사람이 됐다. 얼굴을 알고 이름을 알고 이제 떠난다는 것까지 아는데, 왜 나를 봤는지도, 왜 떠나는지도, 여전히 몰랐다. 아는 게 늘수록 모르는 게 같이 는다는 걸, 나는 이 애 앞에서만 매번 다시 배운다.

"확인 끝났어. 다음 주까지 그거 하나만 내면 돼."

나는 서류철을 덮었다. 업무는 끝났다. 방패를 내려야 할 시간이었다. 방패를 내리자, 방패 뒤에서 내가 얼마나 흔들렸는지가 그제야 보였다.


교실로 돌아가는 복도에서, 도하가 나를 불렀다.

"야, 한이서. 이거." 그 애는 또 이름 없이, 따뜻한 캔 하나를 내밀었다. 자판기 앞을 지나다 그냥 하나 더 뽑았다는 얼굴로. "학생회 일 많지. 이거 마셔." 로맨스도 아니고, 계산도 아니고, 그냥 그 애 몸에 밴 것. 도하는 늘 이렇게, 아무한테나 온기를 나눠 주고 자기가 뭘 줬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 캔을 받았다. 안 받을 이유를 못 찾아서. 그리고 받는 순간, 미결이 또 하나 늘었다는 걸 알았다. 이름 없는 칸. 안 마신 캔이 가방에 벌써 하나 있는데, 오늘 또 하나가 얹혔다. 나는 받은 걸 못 버리는 사람이라, 이 칸들은 계속 쌓이기만 한다.

이상하게, 오늘은 도하의 캔이 예전만큼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 자리를 다른 게 다 차지해서. 손안의 따뜻한 캔보다, 방금 덮은 서류철 속 '다음 주'라는 말이 더 뜨거웠다.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오늘도 안 물었다. 물으면 분간 안 되는 칸이 또 하나 늘 테니까.


집으로 가는 길, 나는 오늘 하루를 정리했다.

나는 남이 미뤄둔 걸 캤다. 그 애가 안 낸 서류, 안 밝힌 이유, 미뤄둔 떠남. 나는 그 미룸을 하나하나 읽어내고, 시한을 셈하고, 초조해했다. 미결을 못 견디는 사람답게.

그런데 나는, 내가 미뤄둔 건 오늘도 안 캤다.

인정 안 한 가시, 이름 안 붙인 칸, 안 마신 캔, 그리고 닫힌 문이 왜 열린 문보다 궁금한지. 나도 그 애만큼이나 많은 걸 미뤄두고 있었다. 남의 미룸엔 기한을 들이대면서, 내 미룸엔 기한을 안 붙였다. 그 애가 떠나면 내 미결이 영영 안 풀린다고 초조해하면서, 정작 내 안의 미결은 시한도 없이 그냥 방치했다.

어쩌면 그게 얼음공주가 얼음공주인 이유였다. 남의 미뤄둔 것은 못 참으면서, 자기가 미뤄둔 것은 영원히 미룰 수 있는 사람. 관찰자는 남의 시한만 세고, 자기 시한은 안 센다.

영하 4도. 눈은 며칠째 안 왔지만 길은 계속 얼어 있었다. 어떤 미룸은 곧 끝나고, 어떤 미룸은 시한이 없다. 그 애의 '다음 주'는 다가오는데, 내 '언젠가'는 여전히 이름이 없었다. 나는 그날, 남의 다음 주를 걱정하느라 내 언젠가를 또 미뤘다. 그리고 그 미룸이야말로 내가 가장 오래 미뤄둔 것이라는 걸, 그날의 나는 여전히 안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