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miael Studio
작품 소개로7화 · 소설

말 없는 날

폭설 다음 날. 이서는 어제 못 들은 '왜'가 밤새 서랍 밖에 삐져나와 있다. 캐묻는 대신 관찰만 하기로 하지만, 복도에서 이안과 우연히 가까워지고도 그는 완전히 닫힌 채 지나간다. 관찰로도 단서 하나 못 줍는다. 이서는 자기도 모르게 동요를 흘리지만 아무도 목격하지 못한다. 미술실 쪽에서는, 늘 그림에만 빠져 아무도 보지 않던 가을이 처음으로 도하 쪽을 향해 고개를 든다.

밤새 서랍이 안 잠겼다.

나는 미결을 서랍에 넣고 잠가야 잠이 오는 사람이다. 하루 동안 회수 못 한 데이터, 마감 못 친 장부의 빈칸, 대답을 못 받은 질문. 그런 걸 그날 안에 어떻게든 정리해서 서랍에 넣고 열쇠를 돌려야, 나는 눈을 감을 수 있다. 그런데 어제는 안 됐다. 차이안이 봉투 하나 던지고 계단으로 사라지면서 남긴 그 '왜'가, 서랍 밖으로 손가락 한 마디만큼 삐져나온 채 밤새 안 들어갔다. 나는 그걸 밀어 넣으려고 몇 번이나 뒤척였다. 서랍은 끝까지 반 뼘 열려 있었다.

아침에 창을 열자 세상이 얼어 있었다. 눈은 그쳤는데 밤사이 다 얼어붙어서, 길이 유리 같았다. 어제 그렇게 쏟아지던 것이 오늘은 딱딱하게 굳어 발밑에서 뽀득거렸다. 나는 그게 나 같다고 생각했다. 어제까지 흔들리던 게 하룻밤 새 얼어붙어서, 이제 밟으면 소리가 나는 것.


학교는 어수선했다.

얼어붙은 길에 발이 묶여 지각한 애들이 교문으로 줄줄이 미끄러져 들어왔고, 어제 폭설로 반쯤 나갔던 수업 진도는 엉켜 있었다. 나는 그 어수선함이 차라리 반가웠다. 시끄러우면 숨기 쉽다. 나 하나쯤 표정 없이 앉아 있어도, 오늘은 아무도 안 볼 테니까.

나는 어젯밤에 하나를 정해 두고 등교했다. 오늘은 차이안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는다. 캐묻지 않는다. 대신 본다. 나는 사람 마음을 읽어본 적이 없는 대신, 정보로 판단하는 데는 이골이 난 사람이다. 먼저 말을 거는 건 빈틈이고, 빈틈은 수치다. 그런데 관찰은 다르다. 관찰은 얼음 장막을 한 겹도 벗지 않은 채 할 수 있는 유일한 접근이다. 나는 그렇게 정리했다.

물론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건, 사실 나도 알았다. 말을 거는 데는 용기가 필요한데, 그 용기가 나한테 없었다는 것. 관찰이라는 말은, 용기가 없는 사람이 자기 후퇴에 붙이는 가장 점잖은 이름이라는 것. 나는 그걸 알면서도 몰랐다고 우겼다. 나는 그런 데 재주가 있다.


그 애를 처음 본 건 2교시 쉬는 시간, 학생회함 앞 복도에서였다.

나는 어제 받은 봉투를 학생회함에 넣으러 가는 길이었다. 차이안은 자기 반 쪽에서 나오다가, 나와 같은 복도로 접어들었다. 좁은 복도, 마주 오는 방향. 어제 텅 빈 층에서 정면으로 마주 섰던 그 거리보다, 오늘은 더 가까웠다. 사람이 많아 자꾸 좁혀지는 동선 위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가까워졌다.

가까워지면 보일 줄 알았다. 어제 못 읽은 '왜'의 한 조각이라도, 그 애 얼굴 어딘가에 적혀 있을 줄 알았다. 나는 관찰자니까. 스치는 0.5초 안에서도 나는 남의 표정을 사진처럼 찍어 나중에 현상하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그 애한테선 아무것도 안 읽혔다.

어제 나를 확인하듯 보던 그 어두운 눈은, 오늘 완전히 닫혀 있었다. 눈은 내 쪽으로 오지도 않았다. 나를 본 게 아니라 나를 지나쳤다. 어깨 하나 부딪힐 거리에서, 그 애는 시선을 바닥 한 뼘 앞에 고정한 채 나를 없는 사람처럼 지나갔다. 목소리도 없었다. 어제는 "비켜"라도 있었는데, 오늘은 그마저 없었다. 완벽한 무표정. 완벽한 침묵. 나는 그 애가 지나간 자리에서, 방금 스친 게 사람이 맞나 싶었다.

어제 반쯤 열렸던 문이, 오늘 소리도 없이 도로 닫혔다.


나는 봉투를 학생회함에 넣고, 잠깐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관찰은 실패했다. 나는 아무 단서도 못 줍었다. 표정도, 눈빛도, 말도 없는 사람에게서 읽어낼 수 있는 건 없다. 벽을 완벽하게 친 사람은, 벽밖에 안 보여준다. 나는 그걸 누구보다 잘 안다. 내가 매일 하는 짓이니까. 오늘 그 애는, 어제의 나보다 더 완벽하게 얼어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통제하는 사람은 나여야 했다. 나는 관찰하는 쪽이고, 관찰당하는 쪽은 늘 남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내가 아무리 봐도 아무것도 안 잡혔고, 그 애는 나한테 아무것도 안 내줬다. 데이터가 없으면 판단을 못 한다. 판단을 못 하면 서랍을 못 닫는다. 서랍을 못 닫으면, 나는 계속 반 뼘 열린 채로 있어야 한다. 나는 그게 견디기 힘든 사람이다.

그리고 그때, 이상한 일이 하나 더 있었다.


그 애가 지나가고 난 뒤, 나는 아주 잠깐, 얼굴이 흐트러졌다.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등 뒤로 그 애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동안, 나는 내 얼굴이 내 통제 밖으로 반 발짝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눈매가 풀렸는지, 입가가 굳었는지, 뭔가가 얼음 장막 밖으로 삐져나왔다. 늘 서랍이 반 뼘 열리듯, 오늘은 내 얼굴이 반 뼘 열렸다.

문제는, 내가 그걸 확인할 수 없다는 거였다.

차이안은 이미 나를 안 보고 지나간 뒤였다. 그 애 눈은 오늘 한 번도 내 쪽으로 안 왔으니까. 복도 저쪽에 있던 도하도, 이 시간엔 다른 걸 보느라 나를 못 봤다. 아무도 나를 안 봤다. 내가 방금 흘린 게 티가 났는지 안 났는지, 봐준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나는 그걸 영영 모르게 됐다.

그게 안심이 아니라 더 불안했다. 티가 났다면 누가 봤을 거고, 봤다면 나는 그걸 근거로 대책을 세울 수 있다. 그런데 아무도 안 봤으면, 나는 내가 얼마나 새어 나갔는지조차 모른 채로 하루를 살아야 한다. 관찰자는 세상 다 보면서 자기만 못 본다. 남의 얼굴은 사진처럼 찍으면서, 자기 얼굴은 거울 없이는 못 본다. 그리고 그 순간, 나한테는 거울이 없었다.

나는 처음으로, 관찰자라는 자리가 무서웠다. 남을 다 보는 대신, 자기가 무너지는 건 아무도 안 봐주는 자리라서.


점심시간, 나는 미술실 쪽 복도를 지나갔다.

일부러 그쪽으로 돈 건 아니라고, 나는 또 나한테 우겼다. 그냥 그 복도가 학생회실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어제도 그제도 그 지름길엔 가을이 있었고, 오늘도 있었다. 창가에서, 어제 그리던 설경 그림을 이어 그리고 있었다. 눈은 그쳤는데 그 애 종이 위에서는 아직도 눈이 내리는 중이었다. 그 애는 그림에 빠지면 세상이 회색으로 흐려지는 애다. 옆에서 누가 뭘 해도 모른다. 그건 지난 몇 주 동안 내가 관찰로 확인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복도 끝, 반대쪽에 도하가 있었다.

오늘 도하는 다가가지 않았다. 어제는 그래도 한 발을 뗐다가 멈췄는데, 오늘은 그마저 안 했다. 그냥 멀찍이 서서, 가을의 옆모습을 봤다. 손에 뭘 들고 빙글빙글 돌리지도 않았다. 그냥 봤다. 늘 누구한테나 먼저 다가가 말을 걸던 애가, 오늘은 다가가는 것 자체를 접고 멀리서 보기만 했다. 도하도 오늘은 관찰자였다. 이 학교엔 오늘 관찰자가 너무 많았다.

나는 그 둘을 멀리서 봤다. 보는 도하와, 보이는 줄 모르는 가을. 익숙한 그림이었다. 지난 몇 주 내내, 도하는 늘 보는 쪽이고 가을은 늘 모르는 쪽이었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그 그림이 한 번 어긋났다.


가을이 고개를 들었다.

그림에 빠져 세상이 안 보이던 애가, 무슨 바람이었는지 잠깐 연필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복도 끝, 도하가 서 있는 쪽으로 눈을 한 번 줬다. 아주 잠깐이었다. 일 초나 됐을까. 그 애는 곧 다시 종이로 눈을 내렸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연필을 움직였다. 도하는 그 일 초를 눈치챘는지 못 챘는지, 그대로 굳어 있었다.

나는 그 일 초를 놓치지 않았다.

늘 아무도 안 보던 가을이, 오늘 처음으로 누군가를 봤다. 그게 하필 도하였다. 의미가 있는 시선이었는지는 모른다. 그냥 인기척에 반사적으로 든 고개였을 수도 있다. 나는 그 애 속을 못 읽으니까. 그런데 그 일 초가, 내 가슴 어딘가를 예고 없이 찔렀다.

가시가 욱신했다. 이번엔 어제보다 깊었다.


이상했다. 어제까지 내 가시는 도하가 가을을 볼 때 욱신했다. 그건 그래도 견딜 만했다. 도하가 일방적으로 보는 거였으니까. 보는 사람만 있고 보이는 사람이 모르면, 그건 아직 아무것도 아니니까. 나는 그렇게 나를 달랬다.

그런데 오늘은 가을이 도하를 봤다. 반대 방향의 시선이 처음으로 생겼다. 남의 시선 두 개가, 오늘 처음으로 같은 선 위에 놓일 뻔했다. 그리고 그 선은, 내가 낄 자리가 없는 선이었다.

그게, 내 것보다 선명하게 아팠다. 내 마음은 얼음 장막 아래 뭉개서 안 보이는데, 남의 마음 두 개가 만나려는 건 이렇게 또렷하게 보인다니. 관찰자의 형벌이었다. 남의 것만 잘 보이는 눈을 가진 죄.

나는 또, 인정할 뻔했다. 내가 왜 이렇게 아픈지, 사실 나는 안다. 저 선 위에 내가 없어서 아픈 거다. 도하 옆자리가, 나는 갖고 싶었던 적도 없다고 우겨왔는데, 남이 그 자리에 반 발짝 다가서는 걸 보니 그제야 그 자리가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나는 오늘도 눈을 돌렸다.

오늘은 이미 미결이 하나 더 늘었다. 내가 아침에 얼마나 티를 냈는지도 모르는 채다. 여기서 가시까지 인정하면, 서랍이 아니라 내가 다 열려버릴 것 같았다. 반 뼘 열린 서랍 하나도 밤새 못 견디는 내가, 나를 통째로 열 수는 없었다. 나는 그 인정을, 오늘도 유예했다. 벌써 몇 번째인지 세지도 않는다. 세면, 그것도 미결이 되니까.


집으로 가는 길은 아침보다 더 얼어 있었다.

나는 가방 안에서 오늘 하루를 정리했다. 관찰은 실패했다. 차이안에게선 아무것도 못 읽었다. 그 애는 어제 반쯤 열었던 문을 오늘 도로 닫았고, 나는 그 닫힌 문 앞에서 아무 데이터도 못 줍고 돌아섰다. 자기노출은 났는데 아무도 안 봐서, 얼마나 났는지도 모른다. 가을이 처음으로 도하를 봤고, 내 가시는 그걸 보고 어제보다 깊이 욱신했지만, 나는 그것도 인정하지 않았다.

미결은 하나도 안 풀렸다. 오히려 '내가 티냈나'라는 미결이 하나 더 늘었다. 나는 미결을 못 견디는 사람인데, 요즘 나는 미결을 늘리는 재주만 는다. 정리하려고 정리할수록 빈칸이 더 생긴다. 이 학교는 알수록 모르는 게 늘어나는 곳이라고, 어제 나는 생각했다. 오늘은 거기에 하나를 더 알았다. 볼수록 못 보는 게 늘어나는 곳이기도 하다는 것.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의 닫힌 문이 어제의 열린 문보다 더 궁금했다.

어제는 문이 반쯤 열렸을 때 무서웠다. 오늘은 그 문이 도로 닫혔는데, 무섭기는커녕 그 안이 더 궁금했다. 왜 저 애는 하루 만에 저렇게 완벽하게 닫혔을까. 어제 봉투를 내밀던 손끝이 나만큼 차가웠던 건, 그냥 추워서였을까. 왜 오늘은 눈도 안 줬을까. 안 주는 게, 정말 관심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관심을 안 들키려고 그러는 걸까. 나는 벽을 치는 사람을 안다. 벽을 진짜 무관심으로 치는 사람과, 무관심으로 위장해서 치는 사람은 벽 두께가 다르다. 그 애 벽은, 오늘 너무 두꺼웠다. 무관심한 사람은 벽을 그렇게까지 두껍게 안 친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는 멈췄다. 이건 관찰의 결론이 아니라, 관찰을 핑계로 그 애를 자꾸 떠올리고 있는 거였다. 나는 오늘 그 애한테서 단서를 못 줍었다면서, 집에 오는 내내 그 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데이터가 없는데도 파일이 안 닫히는 것. 그건 미결이 아니라 다른 거였다. 나는 그 다른 이름을 아직 안 붙였다. 붙이면, 분간 안 되는 칸이 하나 더 늘 테니까.

영하 4도. 길은 밤에 더 얼 것이다. 오늘은 아무도 말하지 않은 날이었다. 나도, 차이안도, 도하도, 가을도, 모두 보기만 하고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데 말이 없던 하루가, 이상하게 그 어떤 날보다 시끄러웠다. 아무 말도 안 오간 자리에서, 나는 궁금한 게 늘었고 아픈 게 늘었다. 닫힌 문 하나가, 열린 문보다 더 오래 나를 붙잡았다. 그게 무슨 뜻인지, 그날의 나는 여전히 안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