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미엘의 기록
귀는 아직도 조금 아팠어요.
손으로 만지면 거기 있었어요.
왼쪽도 있고, 오른쪽도 있고, 둘 다 제 머리에 붙어 있었어요.
그런데 귀가 몸에 붙어 있다는 사실과, 마음이 아직 그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는 사실은 조금 다른 일인 것 같아요.
오크가 제 귀를 잡았던 순간이 자꾸 떠올랐어요.
아프다는 말밖에 못 하던 순간.
마일이 도망치지 않고 돌아오던 순간.
칼트가 그 사람을 멈춰 주던 순간.
에일린 언니가 피투성이가 된 채로도 무너지지 않으려던 순간.
그리고 헬름스 익스프레스가 더는 일어나지 못하던 순간.
우리는 이겼어요.
피난민들은 모두 살아 있었어요.
하지만 이겼다는 말만 쓰면, 너무 많은 것이 빠져요.
그래서 저는 오늘도 적습니다.
이긴 다음에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살아남은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죽은 사람이 남긴 말이 어떻게 살아 있는 사람에게 닿았는지.
그리고 문이 닫혀 있을 때, 누가 그 문을 열게 했는지요.
살아 있는 사람들
전투가 끝난 자리에는 냄새가 남아 있었어요.
피 냄새.
흙이 뒤집힌 냄새.
오크의 땀과 가죽 냄새.
그리고 사람들이 너무 오래 참았다가 한꺼번에 숨을 쉬는 냄새 같은 것도 있었어요.
피난민들은 우리를 보며 감사하다고 했어요.
"결사단님들. 덕분에 살았습니다. 저희가 어찌 감사를 해야 할지."
그 말은 따뜻했지만, 저는 조금 무서웠어요.
감사라는 말은 가끔 너무 커요.
제가 그 말을 다 받을 만큼 큰 사람인지 모르겠어서요.
저는 그분들에게 말했어요.
"감사하다고 해주셔서 고마워요. 하지만 지금은 저보다 서로를 봐주세요. 다친 사람은 앉히고, 물을 나눠 마시고, 혼자 있는 사람이 없게 해주세요."
말하고 나니 제 귀가 다시 욱신거렸어요.
혼자 있으면 아픔이 더 커져요.
아픔은 빈자리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사람 옆에 사람을 두어야 해요.
칼트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잠깐 쉬는 게 좋겠다고 했어요.
"제가 정찰을 돌고 있겠습니다."
칼트는 그렇게 말했어요.
칼트도 다쳤어요.
귀 수집가와 싸운 사람은 칼트였고,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사람도 칼트였어요.
그런데 그는 쉬기보다 먼저 주변을 보겠다고 했어요. 나보다 훨씬 어른 같았어요.
저는 칼트 아저씨라고 부를 뻔하다가, 급히 고쳤어요.
"칼트. 죄송해요. 저도 조금만 쉴게요. 아직 귀가 아파요."
칼트는 뭐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냥 자기 방식대로 움직였어요.
자연에게 기도하고, 핀토를 타고 주변을 돌러 갔어요.
핀토가 함께 갔으니 조금은 안심됐어요.
말은 말을 못 해도, 곁에 있다는 것으로 사람을 붙잡아 주니까요.
에일린 언니는 피난민들을 살폈어요.
누가 걷기 어려운지, 누가 다쳤는지, 누가 물을 먼저 마셔야 하는지 보았어요.
큰 부상자는 없다고 했어요.
그 말이 너무 좋아서 저는 잠깐 눈을 감았어요.
빛님,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아요.
피로 적힌 이름
칼트는 돌아와서 두 가지를 말했어요.
첫째는 초록색 점액질과 커다란 발자국.
오크 뚱보들의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었어요.
하나가 아니었어요.
네다섯쯤 되는 것들이 한쪽으로 움직인 흔적이라고 했어요.
그 말만으로도 속이 무거워졌어요.
그런 것이 하나만 있어도 힘들었는데, 여러 마리라면요.
하지만 그 방향이 우리가 바로 가려는 길과 같지는 않다는 말에, 저는 조금 숨을 돌렸어요.
둘째는 피와 낙서였어요.
칼트는 바닥에 그 문양을 그려 보였어요.
에일린 언니가 그것을 보았고, 마브리도 보았어요.
오크어라고 했어요.
대단한 악필이라고도 했어요.
그 안에는 이름들이 적혀 있었어요.
하플토.
레일.
말트.
그리고 제가 다 기억하지 못하는 다른 이름들.
그 이름들은 그냥 낙서가 아니었어요.
주민들이 듣고 서로를 보았어요.
"하플토요? 레일?"
누군가는 옆집 아이 이름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다른 마을 사람 이름이라고 했어요.
늙은 사람도 있고, 아이도 있고, 애 아빠도 있다고 했어요.
이름은 이상해요.
그냥 글자 몇 개처럼 보이지만, 누군가가 부르면 사람이 일어나요.
레일이라는 이름도 그랬어요.
제 품 안에는 아직 편지가 있었어요.
처음 마을에서, 팔 한쪽을 잃고도 자기 피를 막지 않고 딸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던 사람.
하플토.
그 사람의 편지.
그 이름이 피로 적힌 글자 속에 있고, 레일의 이름도 그 안에 있었어요.
저는 생각했어요.
빛님, 이름을 왜 피로 적나요.
사람 이름은 밥그릇 옆에 적거나, 편지 끝에 적거나, 서로를 부를 때 입술에 올려야 하는 것 아닌가요.
칼트가 아엘이라는 엘프식 이름을 귀에 대고 말했어요.
그때 남은 엘프 귀가 꿈틀했어요.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는데, 모두가 조용해지는 것 같았어요.
귀는 죽은 것 같았는데, 죽지 않은 것처럼 움직였어요.
저는 제 귀를 만지지 않으려고 손을 꽉 쥐었어요.
제 귀는 여기 있어요.
저는 아직 들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남은 귀가 들으려는 말도 그냥 넘기면 안 돼요.
저는 종교에 대해 떠올려 보았어요.
오크 사제나 샤먼들이 이름을 토대로 표식이나 저주를 남기는 일이 있다고요.
피가 매개가 되어야 하는 일이라고요.
레일에게 당장 저주가 걸린 것 같지는 않았지만, 모른다는 말은 안전하다는 말과 같지 않았어요.
모르는 것은, 아직 빛님께 밝혀 달라고 부탁하지 않은 방 같아요.
그 안에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지만, 무언가가 웅크리고 있을 수도 있어요.
레일
피난민들 사이에서 레일이 나왔어요.
그녀는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어요.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고, 눈은 잠을 제대로 못 잔 사람의 눈이었어요.
"제가 레일이라고 해요, 기사님."
그 말을 들었을 때, 품 안의 편지가 갑자기 더 무거워졌어요.
종이는 가벼워야 하는데, 어떤 종이는 사람 한 명만큼 무거워요.
저는 레일에게 가까이 갔어요.
두 손을 잡았어요.
"레일 씨... 맞으세요?"
레일은 편지라는 말을 듣자 말이 빨라졌어요.
"뭔 일 있는 거죠?"
그 목소리를 듣고, 저는 편지를 그냥 건네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말은 칼보다 덜 날카로워 보이지만, 어떤 말은 사람을 그 자리에서 쓰러뜨릴 수 있어요.
그래서 앉아 달라고 했어요.
물을 조금 마셔 달라고 했어요.
"당신에게 가야 할 편지를 맡아왔어요. 그분은 마지막까지 당신이 살아 있기를 바라셨어요."
제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레일의 손은 떨리고 있었어요.
편지를 열 때, 그녀의 손가락이 종이 끝을 제대로 잡지 못했어요.
그리고 곧 소매가 젖었어요.
저는 옆에 있었어요.
그냥 옆에 있었어요.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일 때가 있어요.
"많이 아프셨을 텐데도, 자기 상처보다 레일 씨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걸 먼저 생각하셨어요."
말하면서 하플토의 시신이 떠올랐어요.
팔 한쪽이 뜯긴 채로, 피를 흘리면서도 편지를 쓰던 사람.
사람은 정말 이상해요.
죽어가면서도 자기 피보다 다른 사람의 발걸음을 먼저 생각할 수 있어요.
레일은 제 손을 잡았어요.
아플 정도로 세게요.
손목 아래가 저려왔지만 저는 빼지 않았어요.
그 사람이 지금 잡을 수 있는 것이 제 손이라면, 제 손은 거기 있어야 했어요.
"아빠는."
레일이 말했어요.
"매번 싫었어요. 이름도 이상했고, 저 때문에 많이 싸웠고."
그 말은 고백 같기도 하고, 미안함 같기도 하고, 화 같기도 했어요.
저는 누군가를 '아빠'라고 부르며 싫어해 본 적도 없어요. 싫어할 아빠조차 저에게는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레일 씨가 아빠를 싫어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게, 어쩌면 부러운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레일이 자기 마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면 했어요.
죽은 사람을 사랑하려면, 그 사람을 한 가지 색으로만 칠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싫었던 마음이 있어도 괜찮아요. 그래도 사랑받았던 일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요."
레일은 조금 걷고 싶다고 했어요.
그래서 저는 같이 걷겠다고 했어요.
"제가 옆에 있을게요."
편지는 전해졌어요.
하플토의 마지막 말은 길을 잃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가벼워지지 않았어요.
무거운 것을 제대로 내려놓아도, 손바닥에는 한동안 자국이 남는 것 같아요.
여관으로 가는 길
피난민들이 갈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어요.
본부로 돌아가려면 너무 멀었고, 숲은 숨을 수 있어도 살 수 있는 곳은 아니었어요.
사람은 숲에서 며칠 숨어 있을 수는 있어도, 계속 두려움만 먹고 살 수는 없어요.
가장 가까운 튼튼한 곳은 여관이라고 했어요.
반델프라는 여관주인이 있는 곳.
주민들은 그 사람을 좋게 말하지 않았어요.
괴팍하고, 피난민을 보면 길길이 날뛸 것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여관은 튼튼하고, 구석진 곳에 있고, 열몇 사람이 몸을 붙일 수 있다고 했어요.
칼트는 전시 징발이라는 말을 떠올리고 조금 기뻐 보였어요.
그 단어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어요.
저는 말했어요.
"제가 가서 고개를 숙여드릴게요. 가깝고 안전하다면 마다할 이유도 없잖아요?"
걷는 길은 길었어요.
사람들은 피곤했고, 말들도 피곤했어요.
저는 새벽이를 몰며 에일린 언니를 챙겼어요.
헬름스 익스프레스가 없다는 사실은 길 위에서 더 크게 느껴졌어요.
자리가 비어 있었어요.
말 한 마리가 없어진 것인데, 길의 모양이 달라진 것 같았어요.
칼트는 앞에서 계속 주변을 봤어요.
비전투 인원이 이렇게 많은 길은 칼트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았어요.
저는 칼트의 등이 피곤해 보인다고 생각했어요.
사람은 앞을 보고 걸어도, 등으로 많은 말을 해요.
칼트의 등은 "지금 쓰러지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어요.
닫힌 문
여관은 정말 튼튼해 보였어요.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한 순간, 바로 무서워졌어요.
튼튼한 문은 안에 있는 사람을 지켜 주지만, 밖에 있는 사람을 막기도 하니까요.
반델프와 무장한 일꾼들은 우리를 경계했어요.
그들의 눈에는 우리가 도움을 청하러 온 사람이라기보다, 귀찮은 위험을 끌고 온 사람처럼 보이는 것 같았어요.
칼트는 지치고 피곤해서 짜증이 많이 난 상태였어요.
상대가 적인지 아군인지 분명하지 않은 것을 싫어했어요.
칼트는 차라리 적이 확실하면 더 편한 사람처럼 보일 때가 있어요.
그건 무서운 일이지만, 이해가 안 되는 일은 아니에요.
칼트는 아주 오래, 그런 곳에서 살아왔을 테니까요.
일꾼의 무기가 움직였고, 상황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어요.
저는 숨을 삼켰어요.
여기까지 와서, 사람들을 살려서 데려와서, 여관 문 앞에서 싸우게 되면 안 돼요.
칼트가 대검을 뽑으려는 기색이 있었고, 에일린 언니가 앞으로 나섰어요.
깃창이 땅에 박혔어요.
방패가 움직였어요.
칼트에게 날아오던 공격을 에일린 언니가 막았어요.
그 순간 에일린 언니는 아주 반듯해 보였어요.
흔들리지 않는 벽 같았고, 동시에 문을 두드리는 사람 같았어요.
벽과 문이 같은 사람 안에 있을 수 있다는 걸, 저는 에일린 언니를 보며 자주 배워요.
에일린 언니는 모두를 진정시키려 했어요.
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잘 들렸어요.
반델프에게 피난민들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를 말했어요.
이 사람들이 지금 어디로 갈 수 있는지.
이 여관이 왜 필요한지.
그리고 우리가 그냥 떼를 쓰러 온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오려는 것이라는 점을 말했어요.
저도 옆에서 말했어요.
건틀릿 결사단의 이름과, 뒤에 있는 사람들이 처한 위험을요.
하지만 문을 열게 한 것은 에일린 언니였어요.
그녀가 방패를 들고도 싸움을 끝내려 했기 때문이에요.
칼로 이기는 것보다, 칼을 빼지 않게 만드는 일이 더 어려울 때가 있어요.
반델프는 처음에는 거칠었어요.
그래도 결국 문을 열었어요.
피난민들이 여관 안으로 들어갔어요.
그 순간 저는 조금 울 뻔했어요.
문이 열리는 소리가, 오늘은 종소리처럼 들렸거든요.
처음 말이 거칠었다고 해서, 마지막에 한 좋은 일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마지막에 좋은 일을 했다고 해서, 처음의 상처가 자동으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에요.
스튜
여관 안에는 지붕이 있었어요.
문이 있었고, 벽이 있었고, 사람들이 등을 붙일 자리가 있었어요.
그것만으로도 공기가 조금 달라졌어요.
밖에서 떨던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오면, 몸보다 먼저 숨이 녹는 것 같아요.
저는 냄비를 찾았어요.
남은 귀리와 말린 고기, 딱딱해진 빵을 모았어요.
물은 넉넉히 부었고, 소금은 조금만 넣었어요.
굿베리가 있다면 으깨고, 허브가 남아 있다면 냄새를 덮을 만큼만 넣었어요.
맛있는 음식이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따뜻했어요.
오늘은 그게 중요했어요.
아이와 노인들에게 먼저 나누어 주었어요.
그릇을 받는 손들이 떨렸어요.
저는 그 손들을 보며 생각했어요.
살아 있는 사람은 그릇을 잡을 수 있어요.
입김을 불 수 있어요.
뜨거워서 조금 기다릴 수도 있어요.
그런 작은 일들이, 오늘은 전부 기적 같았어요.
칼트는 바깥에서 노숙하겠다고 했어요.
여관 안이 더 따뜻할 텐데도요.
그는 목책을 만들고, 핀토를 돌보고, 장비를 손질했어요.
오크의 피와 살점이 묻은 대검을 닦는 손이 피곤해 보였어요.
하지만 칼트는 그런 일을 좋아하는 것 같기도 했어요.
동물 돌보는 것 다음으로 목책 만드는 시간이 좋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저는 조금 웃었어요.
칼트는 가끔 아주 무서운 사람처럼 보이다가, 갑자기 숲속에서 오래 살아온 다정한 사람처럼 보여요.
에일린 언니는 피난민들의 잠자리를 나누었어요.
누가 어디서 자야 서로 덜 불편한지, 누가 가까운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반델프에게 경계는 어떻게 부탁해야 하는지 정리했어요.
저는 그런 에일린 언니를 보며 또 생각했어요.
언니는 정말 보고서처럼 사는 사람 같아요.
줄을 세우고, 빠진 것을 확인하고, 위험을 이름 붙여 적어요.
그런데 오늘은 그 꼼꼼함이 사람들을 쉬게 했어요.
저는 스튜를 나눠주고, 말먹이와 강아지 먹이도 챙겼어요.
그리고 침대에 누웠는지, 바닥에 앉았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을 만큼 잠들었어요.
몸이 "이제 됐다"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아침 기도
아침은 왔어요.
정말 왔어요.
창밖의 빛이 여관 안으로 들어왔고, 새 소리도 들렸어요.
전날의 피와 비명 뒤에도 아침이 오는 일은 늘 이상해요.
당연한 일인데, 당연하지 않은 선물 같아요.
저는 먼저 기도했어요.
아침빛님께, 살아 있는 사람들을 지켜 주셔서 감사하다고.
죽은 사람들의 이름도 잊지 않게 해달라고.
그리고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덜 무섭게 해달라고요.
그 다음에는 마브리를 끌고 가서 씻겼어요.
마브리는 깨끗하면 오크에게 오히려 들킨다고 했어요.
"샤워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이거 다 은신을 위해서인..."
말은 끝까지 못 했어요.
제가 끌고 갔거든요.
"언제나 신을 대할 땐 깨끗한 몸을 해야 해요."
마브리가 싫어하는 소리가 여관 안에 울렸지만, 저는 굴하지 않았어요.
어제 무서운 일을 겪었으니까 더 씻어야 해요.
피 냄새와 오크 냄새가 몸에 오래 남으면, 마음도 계속 그곳에 있는 줄 알 수 있으니까요.
에일린 언니는 오랜만에 침대에서 푹 잤어요.
칼트도 오랜만에 꿀잠을 잤다고 했어요.
저는 어제 못 쓴 보고서를 쓰고 있었어요.
펜 끝이 종이에 닿을 때마다, 전날의 일이 조금씩 모양을 갖췄어요.
보고서는 어렵지만 필요해요.
마음속에만 있으면 너무 커져서, 어디부터 만져야 할지 모르는 일도 있거든요.
델피
반델프가 우리를 불렀어요.
아침의 반델프는 어제보다 조금 덜 날카로워 보였지만, 말은 여전히 삐죽삐죽했어요.
그는 자기 딸 이야기를 꺼냈어요.
이름은 델피.
3일 전부터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어요.
처음에는 늦게 돌아오는 정도였던 것 같지만, 이제는 달랐어요.
3일은 긴 시간이에요.
특히 주변에 오크들이 있고, 피로 이름을 쓰는 자들이 있고, 독이 든 포도주가 사라졌다면요.
반델프는 델피가 근처 산 쪽의 약초쟁이와 만났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남자를 이름으로 부르기보다 약초쟁이라고 부르는 것 같았어요.
반델프는 딸을 걱정하고 있었어요.
그건 느껴졌어요.
하지만 걱정하는 말의 모양이 너무 못났어요.
그는 델피를 나쁜 말로 불렀고, 데려오면 혼내 달라는 식으로 말했어요.
다리 몽댕이를 어쩌고 하는 말도 했어요.
저는 마음이 찌푸려졌어요.
"사람은 물건처럼 되찾아오는 게 아니에요. 딸이라면 더더욱요."
반델프는 투덜거렸어요.
자기가 키웠고, 은혜도 모르고, 남자에게 씌였고, 좋은 데 시집보내야 하는데 어쩌고 했어요.
말들이 자꾸 델피를 작게 만들었어요.
저는 그게 싫었어요.
"3일이면 그냥 늦게 돌아오는 것과는 달라요. 혼낼 말보다 찾을 단서가 먼저 필요해요. 그 남자분 이름, 마을, 마지막으로 본 장소를 알려주세요. 그리고 델피 씨를 그렇게 부르지는 말아주세요. 돌아올 문이 더 작아져요."
말하고 나서, 제가 문 이야기를 또 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어제는 여관 문이었고, 오늘은 집으로 돌아오는 문이었어요.
문은 나무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에요.
말로도 만들어져요.
누군가가 계속 "돌아오면 혼난다"고 말하면, 집 앞까지 와도 손이 문고리에 닿지 않을 수 있어요.
저는 델피가 살아 있다면, 돌아올 수 있는 문이 있었으면 했어요.
물론 델피가 정말 돌아오고 싶은지도 확인해야 해요.
집이 모두에게 쉬는 곳은 아닐 수 있으니까요.
그 생각을 하자, 저는 조금 복잡해졌어요.
사람을 구한다는 건, 어디로 데려오면 끝나는 일이 아닌가 봐요.
포도주
에일린 언니는 델피 말고 없어진 물건이 있는지 물었어요.
반델프의 목소리가 커졌어요.
돈이 없어졌고, 귀한 포도주도 없어졌다고 했어요.
그 포도주를 만들려고 밤낮으로 고생했다고요.
그리고 "괴상한 도구"라는 말이 나왔어요.
칼트의 눈이 반응했어요.
저도 고개를 들었어요.
괴상한 도구.
이런 말은 보통 그냥 지나가면 안 돼요.
특히 오크와 저주와 피와 귀가 이미 있는 날에는요.
반델프는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어요.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은 보통 그렇게 숨기지 않아요.
칼트는 외눈 같은 문양이 있냐고 물었어요.
반델프는 그런 건 없다고 했어요.
저는 말했어요.
"그 도구가 뭔지 알면 따님을 찾는 데 도움이 더 될 것 같아요."
반델프는 비싸고 귀하니까 델피가 가져갔을 거라고 했어요.
그리고 포도주 하나를 꺼냈어요.
그는 그것을 보물처럼 말했어요.
"이것만 먹으면 천하장사도 힘이 쫙 빠지죠."
처음에는 독한 술이라는 뜻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아니었어요.
독이 있는 포도주였어요.
저는 눈을 깜빡였어요.
사람이 왜 독을 포도주에 넣나요.
포도주는 기쁘거나 슬프거나, 사람들이 같이 앉을 때 마시는 것 아닌가요.
물론 저는 술을 잘 몰라요.
하지만 독이 들어간 포도주가 좋은 물건일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반델프는 그걸 자랑스럽게 말했어요.
저는 보고서 생각이 났어요.
에일린 언니가 늘 말하는 보고서.
있는 일을 정확히 적어야 하는 종이.
저는 펜을 들 듯 마음을 다잡고 말했어요.
"보여주지 않겠다면, 저희는 이렇게 보고할 수밖에 없어요. 독이 든 포도주가 유출되었고, 소유자가 확인을 거부했다고요."
반델프의 얼굴이 구겨졌어요.
저는 더 말했어요.
"그건 이제 재산 문제가 아니에요. 독이 든 포도주가 밖에 나갔다면 사람이 죽을 수 있어요."
말하면서 제 목소리가 평소보다 차분하다는 걸 느꼈어요.
화가 났는데, 소리 지르고 싶지는 않았어요.
어떤 말은 작게 해야 더 잘 박힐 때가 있어요.
"보여주지 않으시면, 독을 숨긴 사람으로 보고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보여주시면, 딸을 살리려는 아버지로 기억할게요."
반델프는 흔들렸어요.
에일린 언니가 옆에서 차갑게 보고 있었어요.
결국 반델프는 상자를 가져왔어요.
자물쇠가 다섯 번이나 열리고, 붕대와 가죽더미가 풀렸어요.
그 안에는 수상한 빛이 나는 유리병 세트가 있었어요.
정말 수상했어요.
수상하다는 말이 사람이라면 저 유리병을 가리키며 "저예요" 하고 손을 들었을 거예요.
숄로틀의 엔지니어 키트
유리병마다 도구의 이름이 적혀 있었어요.
반델프가 술 제조 도구의 이름이 적힌 병을 쏟자, 안의 것이 젤리처럼 흘러나왔어요.
그리고 어느 순간 술 제조 도구가 되었어요.
다시 병에 넣으니 젤리처럼 변했어요.
저는 코를 찡그렸어요.
"으윽... 지독한 냄새가 날 것 같아요."
반델프는 나름 깨끗하다고 했어요.
자체적으로 청소가 되는 것 같다고요.
칼트는 눈을 반짝였어요.
깨뜨릴까 봐 한 발 물러났지만, 마음은 이미 가까이 간 것 같았어요.
"와 이거 만능도구구나!"
설명서에는 숄로틀의 엔지니어 키트라고 적혀 있었다고 해요.
이름부터 이상했어요.
읽으면 안 될 것 같고, 그런데 읽지 않으면 더 위험할 것 같은 이름이었어요.
칼트가 설명서를 읽었어요.
그리고 곧 아주 이상해졌어요.
"그렇구나! 빨간색에서 신 맛이 나는 건 나비의 춤처럼 술에 노란색을 보셨나요 토끼다!"
저는 칼트를 보았어요.
"응? 칼트가 이상해졌어요."
반델프는 자기도 그랬다고 했어요.
저 상태로 하루 동안 있을 거라고요.
칼트는 이상한 이름을 외쳤고, 에일린 언니가 머리를 탁 쳤어요.
잠시 뒤 칼트는 따옴표와 골뱅이에 대해 이상한 말을 했어요.
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순간 칼트가 우리 세계 밖을 살짝 보고 온 것 같았어요.
그건 보고서에 쓰기 어려운 종류의 일이에요.
에일린 언니가 다시 설명서를 읽겠다고 했어요.
저는 빛님께 살짝 부탁했어요.
에일린 언니가 잘 읽을 수 있게요.
언니는 집중해서 설명서를 읽었고, 아주 많은 것을 이해했어요.
제작 순서, 배열법, 조직 같은 것들.
아주 작은 글씨로 적힌 특수 문구도 읽었다고 했어요.
양피지 가장자리에 바늘 끝으로 긁어 놓은 계약 문구처럼 작게 적혀 있었다고 하는데, 저는 그것이 얼마나 나쁜 버릇인지는 알 것 같았어요.
그리고 에일린 언니도 이상해졌어요.
"사랑스러운 구두...!"
저는 에일린 언니를 흔들었어요.
"에일린 언니. 정신 차려요."
칼트도 고민하다가, 아까 에일린 언니가 자기에게 해준 것을 했어요.
머리를 가볍게 콩.
에일린 언니는 곧 정신을 차렸지만, 구두 수선 도구에 대한 지식이 머릿속에 들어온 것 같았어요.
저는 걱정됐어요.
지식은 좋은 거예요.
하지만 허락 없이 머릿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지식은 좋은 손님이 아니에요.
그건 문을 두드리지 않고 들어오는 사람 같아요.
이상한 도구는 그 자체로 힘이 있었고, 힘은 늘 조심해야 해요.
반델프는 독버섯을 포도주에 넣어 독 포도주를 만들었다고 했어요.
칼트는 약초를 넣으면 포션도 되냐고 물었어요.
에일린 언니는 독버섯이라는 말에 경악하다가, 포션이라는 말에 멈칫했어요.
저는 말했어요.
"그러면 앞으로 독주가 아니라 약주를 만드는 건 어때요?"
그 말은 진심이었어요.
위험한 도구라도, 사람을 다치게 하는 대신 낫게 하는 데 쓸 수 있다면 좋잖아요.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조심하라고 말했어요.
좋은 뜻만으로 안전해지는 물건은 아니니까요.
주운 물건
에일린 언니가 그 도구를 어디서 얻었는지 물었어요.
반델프는 마탑으로 이송되던 것에서 떨어졌고, 자기가 주웠으니 자기 것이라고 했어요.
그 말에 거짓은 없어 보였어요.
하지만 거짓이 없다는 말과 옳다는 말은 또 달라요.
길에 떨어진 아이를 주웠다고 해서 아이가 물건이 되는 게 아닌 것처럼, 마법 도구도 그냥 주웠다고 자기 것이 되는지는 모르겠어요.
저는 반델프가 그 물건을 잃을까 봐 무서워한다는 것을 보았어요.
동시에 자기도 정말 자기 것인지 조금 의심한다는 것도 보았어요.
사람은 자기가 한 말을 스스로도 완전히 믿지 못할 때, 목소리가 조금 달라져요.
저는 도구를 빨리 넣어 달라고 했어요.
칼트와 에일린 언니가 너무 이상해졌기 때문이에요.
반델프는 다시 자물쇠를 잠갔어요.
저는 말했어요.
"이제 저희는 따님을 찾으러 가 볼게요. 저는 이 사실을 따로 보고서에 쓰진 않을 거고요."
말하고 나서 바로 덧붙였어요.
"물론, 에일린 언니가 보고서에 꼭 쓰라고 명령하면 쓰겠지만요."
약속은 중요해요.
하지만 위험한 일도 중요해요.
이럴 때 저는 아직 어떤 약속이 더 앞서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에일린 언니가 판단할 거라고 믿었어요.
에일린 언니는 반델프에게 더 이상 위험한 물건을 만들지 말라고 했어요.
독버섯 같은 위험 물질도 넣지 말라고 했어요.
저도 고개를 끄덕였어요.
반델프는 알겠다고 했어요.
정말 알았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말하게 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때도 있어요.
떠날 준비
델피를 찾아야 해요.
3일 전부터 돌아오지 않은 딸.
약초쟁이.
산 쪽.
사라진 돈과 포도주.
독이 든 술.
마탑으로 가던 수상한 도구.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오크들의 흔적.
이 모든 것이 한 줄로 이어지는지, 아니면 서로 다른 매듭인지 아직 알 수 없어요.
하지만 가야 한다는 것은 알았어요.
마일과 마브리는 여관에 남아 주민들을 지키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피난민들은 이제 겨우 지붕 아래에 들어왔어요.
그들을 다시 혼자 두면 안 돼요.
칼트는 아마 밖을 보며 움직일 거예요.
에일린 언니는 길과 단서를 정리할 거예요.
저는 보고서를 챙기고, 성표를 만지고, 새벽이의 목을 쓰다듬을 거예요.
그리고 가능하면 밥도 챙길 거예요.
길이 아무리 급해도, 배고픈 마음은 쉽게 뾰족해지니까요.
오늘은 자꾸 문이 떠올랐어요.
레일에게 편지를 전할 때도 문이 있었어요.
죽은 아버지의 말이 살아 있는 딸에게 들어가는 문.
여관 앞에도 문이 있었어요.
에일린 언니가 설득해서 열게 한 문.
델피에게도 문이 있을 거예요.
돌아가야 하는 문일 수도 있고, 나오고 싶었던 문일 수도 있어요.
아직은 모릅니다.
하지만 문 앞에 사람이 서 있다면, 저는 먼저 물어볼 거예요.
아파요?
배고파요?
들어가고 싶어요, 아니면 나오고 싶어요?
빛님.
오늘도 조금만 밝혀 주세요.
닫힌 문 앞에서, 손잡이가 어디 있는지 볼 수 있을 만큼만요.